제레온 프리츠 X 조안나 프리츠
크리스티네 프리츠가 기억하는 조안나 프리츠는 다정하지만 유약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온화함은 마치 섬세하게 짜인 레이스 면사포와도 같아서, 새벽이슬을 머금은 거미줄만큼이나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찢어지기도 쉬웠다. 크리스티네가 어릴 때부터, 조안나는 딸을 과보호하는 기질이 있었다. 정원을 뛰어다니다가 잠시라도 시야에서 벗어나면 울음의 끝자락에 머무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고, 크리스티네가 황급히 어머니의 눈앞으로 돌아오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열 살의 크리스티네는 자기를 꼭 끌어안는 어머니의 떨리는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래서 안타리우스가 프리츠 저택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는 당연히 어머니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트 뮐러라는 이름을 쓴 이후 처음으로 프리츠 저택에 가는 것이었지만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었기에 그녀는 눈감고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가냘픈 어머니는 분명 겁에 질려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 크리스티네는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크리스티네가 저택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문을 발로 거침없이 걷어차고 들어서자 눈앞에 보인 건 얼어붙은 조안나 프리츠와 한때 제레온 프리츠‘였던’ 검은 인영이었다. 안타리우스는 계약을 파기한 대가로 제레온 프리츠의 능력만 가져간 게 아니었다. 크리스티네는 아버지가 세뇌 당했다는, 보고서에서 수도 없이 읽었던 정보를 직접 마주하자 이를 악물고 검을 고쳐 쥐었다. 가슴에서 타오르는 분노가 그녀의 팔에 힘을 불어넣었다.
“어머니, 물러나십시오. ‘저건’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자 조안나는 창백한 얼굴로 반걸음 정도 뒷걸음질 쳤고, 그와 동시에 크리스티네가 튀어나갔다.
***
레이피어를 쓰는 그녀는 빠르고 정확한 공격으로 상대방의 방어를 찢어발기는 검사였다. 하지만 아무리 세뇌당하여 본인의 의지가 없다하더라도, 한때 황실 호위대장의 자리까지 오른 자를 단숨에 쓰러뜨리기는 쉽지 않았다. 크리스티네는 허벅지를 노리며 휘두르는 검을 피하다가 그만 발목을 접질렸다. 아릿한 통증이 절로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주춤하던 움직임을 보던 남자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대검을 아래에서 위로 치켜세웠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렸더라면 필히 팔을 베였을 것이다. 크리스티네는 발목에서 퍼지는 욱신거림보다는 서늘하게 심장을 꿰뚫는 위기감에 집중했다.
하지만 둘의 공격은 아주 작은 소리에 의해 멈췄다.
“제레온… 무서워요……. 이런 거, 이런 건 당신답지 않아요…….”
창가를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조안나의 목소리가 방안에 퍼졌다. 무표정한 남자가 들고 있던 대검은 그 단단함을 잃은 것처럼, 바닥을 향해 늘어졌다. 조안나는 그의 망설임을 읽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크리스티네는 그러면 안 된다고 외치려고 했지만 조금이라도 몸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발목이 끊어질 것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조안나에게는 불안할 때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습관이 있었다. 크리스티네는 지금도 어머니의 손가락에 금발이 걸려있음을 알아차렸다.
“제, 제레온…?”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남편의 흔적을 찾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리고 곧 이어 울음기가 잔뜩 맺힌 속삭임을 내뱉었다. 지금이… 당신이 말했던 그 순간이군요…….
비통한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를 흘린 조안나 프리츠는 자기 머리카락을 고정하는 머리핀으로 남자의 목을 깊숙하게 찔렀다. 곱게 틀어 올린 금발이 한 낮의 햇살처럼 쏟아졌다.
***
“이건… 너무 화려하지 않아요……?”
한때 조안나 뮐러였던-지금은 조안나 프리츠인-여인은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기품이 몸에 배어있고 귀족적인 교육을 통해 스스로를 가다듬을 수 있었지만 눈에 띄는 미모도, 화려한 언변도, 심지어 가문의 강력한 후광도 지니지 않은, 평범한 여자였다. 데뷔탕트 이후로 무도회의 중심에 선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낯을 지나치게 가리는 탓에 가끔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을 오래 붙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엷은 향을 닮은 사람이었다. 은은하게 공기를 건드리다가 이내 흩어져버리는, 부담스럽지 않지만 기억에도 남지 않는 향.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선물한 머리 장식의 화려함에 조금 기가 죽는 것도 당연했다. 기다란 바늘에 진주가 섬세하게 모여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잘 봐줘봤자 밀짚색, 조금 거짓말을 보태야 겨우 금발이 되는 자신의 수수한 머리색과는 어울리지 않다. 자기 머리에 꽂으면 분명 자기가 머리장식을 하는 게 아니라 머리장식이 자신을 받침대로 사용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걱정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러자 제레온이 아내의 손에서 머리핀을 받아들어 그녀의 금발에 꽂아주었다. 시린 금속이 머리카락을 거침없이 헤집고 자리를 잡는 감촉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그렇지 않소.”
제레온은 아내의 둥근 볼을 타고 내려가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주며 대답했다. 아내의 머리카락은 가을날의 밀밭을 닮아있었다. 신이 몸소 가꾼 천국의 밭이 지상에 내려온다면 이런 빛깔을 띨 것이 분명하다고, 제레온은 생각했다. 달빛처럼 시린 프리츠의 은발과는 다르게 포근한 색이었다. 그녀는 늘 스스로를 폄하했지만 조안나는 그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눈부시고 훨씬 강한 여자였다.
그가 프리츠 가문과 안타리우스의 관계를 고백하며 청혼할 때에도, 크리스티네를 대신하여 계약 파기의 대가를 모조리 받겠다고 할 때에도 조안나는 그의 결정을 지지했다. 가주로서, 형으로서, 호위대장으로서 살면서 조안나의 현명한 포옹과 다정한 공감에 다시 일어나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대에게 잘 어울리는군. 남편의 칭찬에 조안나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구름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햇살보다도 황홀했다.
그러나 불행은-언제나 그랬듯이-예고 없이 찾아왔다.
제레온 프리츠는 자신의 영혼이 상처 입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눈치 챘다. 티 없이 새하얗던 머리카락이 죽음의 색이 드러나기 전부터, 그가 정신 분열증으로 진단받기 전부터. 안타리우스의 실험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영향을 주었다. 제레온은 자신의 기억과 사고가 조금씩 와해되는 걸 느꼈고, 이성의 부스러기가 손 틈으로 빠져나가는 걸 가까스로 움켜쥐곤 했다. 안타리우스는 오래된 계약을 파기한 것에 대한 대가이자 벌로, 그의 능력뿐만 아니라 스스로 사고할 의지마저 빼앗으려고 했다.
조안나도 남편의 이상(異常)을 감지했다. 그가 프리츠의 가주도 아니고, 황실의 검도 아니고, 충성스러운 군신도 아니라 평범한 사내일 수 있는 유일한 순간들을 목격하는 사람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모른 척 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정말로 제레온이 변해가는 걸 인정하게 되는 것 마냥, 필사적으로 진실을 외면했다.
어느 날, 제레온이 조안나의 손을 잡아 자기 목에 가져다댔다. 부부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다정하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일은 예사로웠지만 그 날은 그리 편안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얼어붙은 것처럼 경직된 공기 속에서, 손가락 아래로 느껴지는 맥박이 지나치게 선명해서 조안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제레온의 커다란 손에 갇힌 자기 손은 얼마든지 뺄 수 있었다. 자신을 유리 세공품 다루듯, 언제나 조심스러운 남편이었으니. 그럼에도 조안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조안나. 그가 입을 열자 손가락과 공기를 타고 진동이 전해졌다.
“여기가 급소라오. 이 곳을 찌르면 사람을 쉽게 제압할 수 있소.”
그리고는 손에 살짝 힘을 주어 눌렀다. 조안나의 손끝이 남편의 급소를 파고들어갔다.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파리해진 얼굴로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왜… 왜 저한테 알려주시는 거예요……? 무서워요, 제레온…….”
푸른 눈동자를 감싸던 눈물이 둥글게 몸집을 부풀렸다가 투명한 물길을 남기며 고운 볼을 타고 떨어졌다. 제레온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울먹이는 아내의 말간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다정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내가 내 자신이 아니게 되는 날이 올 수 있소. 그때가 오면, 부디 망설이지 말고 나를 찔러주시오. 그 간악한 자들… 안타리우스의 인형이 된 나를 구해주시오. 나를 위해서, 크리스티네를 위해서.”
“제,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제가 뭐라고…….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무, 무서워요……. 새된 목소리가 물기를 머금어 떨렸다. 조안나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자 제레온은 품에 그녀를 안았다. 평생 무예와 동떨어진 세상을 살던 아내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남편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제레온은 자기 목숨을 온전히 내맡길 사람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미안하오. 조안나의 연약한 훌쩍거림이 가슴을 찢고 상처를 헤집었다. 다, 당신이 저를 잊으면 어떡하죠? 한없이 여린 아내의 등을 쓰다듬은 그가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소.”
태어날 때부터 프리츠의 이름을 지고, 안타리우스의 굴레에 갇힌 자신이었다. 그런 기찻길과도 같은 삶에서 유일하게 택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잊을 리가 없었다. 잊을 수도 없었다. 안타리우스가 그의 육체를 괴롭히고, 정신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들고, 의지마저 앗아간다 해도, 영혼 깊숙한 곳까지 각인된 마음까지 빼앗진 못할 것이다.
***
때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찔러 달라. 조안나는 제레온이 어째서 제게 그런 말을 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비능력자에, 조용하고, 위협적이지도 않은 존재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리우스든, 제레온이 소속된 검의 형제 기사단이든, 헬리오스든. 그 순간만큼 자신의 존재감이 희미하다는 사실이 반가운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제레온의 얼굴을 한 사내를 바라봤다. 그리고 잔뜩 흐려진 갈색 눈동자에서 남편의, 아주 작은 흔적을 힘들게 발견하고 자기 머리에 꽂힌 핀을 매만졌다. 제레온에게 선물 받은 이후, 조안나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그 핀으로 머리를 장식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면모를 발견해준 남편에 대한 애정과 신뢰의 표현이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단단함이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제레온. 당신이 저를 믿은 것처럼 저도 저를 믿을게요.
그리고 있는 힘껏 머리핀을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에 찔러 넣었다.
살갗을 찢고 근육을 파고드는 섬뜩한 감각이 팔에 전해지자 조안나는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졌다. 피와 폭력에 익숙하지 않아 그 자리에 주저앉은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 허벅지를 손으로 내리치며 비명처럼 외쳤다.
“크리스티네!”
태어나서 그렇게 크게 소리치는 건 처음이었다. 목이 찢어지는 기분이 들면서 입안에 피비린내가 감돌았다. 다행히 이름만 듣고도 딸은 번개처럼 튀어나가 순간적으로 자세가 흐트러져서 뒤로 비틀거리는 남자를 향해 돌격했다. 원래라면 아무리 세뇌로 의지를 잃었다해도 크리스티네가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 최강의 검’이라는 호칭은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남자는 모든 공격을 맞아주었다. 크리스티네를 몰아붙이던 매서움은 둔해진지 오래였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붙잡지 못할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접질린 발목도 무시하고 칼을 움직였다. 제 몸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온 몸이 날카로운 검날이 된 듯한 감각이었다.
장미 꽃잎처럼 흩날리던 핏방울이 마침내 가라앉았다. 거칠어진 숨소리는 비단 발목의 고통과 전투의 흥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안나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은 다리를 내리치는 걸 그만두고 엉금엉금 기어갔다. 손바닥이 카페트에 쓸리고, 고급스러운 옷감이 구겨지는 것에도 개의치 않은 그녀는 결국 쓰러진 제레온에 닿았다. 이미 피투성이가 된 남자의 머리를 끌어안고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옷에 묻은 붉은 기운이 점점 넓어졌다. 제레, 온……. 끊어질 듯이 여린 목소리로 남편의 이름을 부른 조안나 프리츠는 피에 젖어 뭉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평생 펜보다 무거운 걸 쥔 적이 없는 손가락에 생명 그 자체 만큼이나 묵직한 붉은 얼룩이 묻었다.
남자가 조안나를 향해 팔을 들자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오던 크리스티네가 검을 고쳐 쥐었다. 죽어가는 손길이라도 어머니의 목을 부러뜨리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우와 다르게 손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을 넘겨줄 뿐이었다.
머릿속을 메우던 안개가 물러나자 제레온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눈물을 주룩 흘리는 아내의 얼굴이었다. 아, 사랑하는 그대. 약속을 지켜주었군. 찢어진 목에서 번지는 화끈거림과 출혈에 의한 싸늘함, 그리고 얇은 검으로 베였을 것이 분명한 상흔으로 제레온은 금방 사태를 파악했다. 울지 마시오. 입술은 그렇게 말했지만 목구멍을 막는 피 때문에 음성은 끓는 물과 비슷한 소리를 냈다. 제레온. 그를 내려다본 조안나가 목의 상처위로 손을 눌렀다.
“당신 돌아와, 왔군요……. 마, 말하지 마세요. 피… 피부터 어떻게 해야…….”
조안나가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제레온은 출혈을 막으려는 손을 잡았다. 그리고 최대한 목을 가다듬었다. 마지막 순간만큼은 예전의 남편으로, 아버지로 보이고 싶은 욕심이 났다. 강…해졌구나…… 크리스티네. 절뚝거리며 곁으로 다가온 딸에게 숨결처럼 미약한 칭찬을 속삭인 제레온은 아내를 꼭닮은 푸른색 눈동자에 차오르는 물기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조안나, 고…맙소…….”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 순간에 가장 밝게 타오르듯이, 세뇌의 영향력으로 깊숙한 곳에 잠들었던 제레온 프리츠의 의식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감싸는 금빛 후광을 바라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먼저 가있겠소. 너무 일찍 따라오지 마시오.
@probably_dre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