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린 소망
잭 더 리퍼 ? 유 하딘
성스러운 찬송가가 예배당 안을 가득 채웠다. 앤디는 익숙한 노랫자락을 따라 흥얼거리면서 자신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 평화로운 곡조는 들을수록 마음이 편안했다. 조금이라도 더 '희망'에 다가가는 기분에 휩싸이게끔 했으니까. 희망! 듣기만 해도 한없이 달콤해지는 단어이지 않은가. 안타리우스는 고통뿐인 삶에서 단 하나의 희망을 제시해줌으로써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만들었다. 아마 이곳에 모인 모두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더 깊은 소망을! 두 눈은 희망에 차서 반짝였다. 이 예배에 참석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러한 표정을 짓는다. 동시에 서로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각자 어떠한 고통과 고난이 짓누르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모두가 같은 소망을 품음으로써 동질감 또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앤디는 경건하기까지 한 예배당을 돌아보다가 오늘도 구석에 앉아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어느 순간부터 같은 자리에 앉아있기 시작한 그는, 처음엔 새롭게 참석하기 시작한 신도처럼 보였다. 새로운 얼굴은 흔한 일이다. 안타리우스는 시시각각 커지고 있는 종교단체인지라 새 신도를 포함하여, 작은 꼬투리라도 잡기 위해 섞어 들어오는 기자나 어떠한 끄나풀들이 종종 등장하곤 했으니까. 앤디는 가십지 구석에 실려있던, 안타리우스를 비방하는 글이 문득 생각나면서 불쾌해졌다. 그런 자들은 구원받을 가치도 없지. 혀를 차면서 이번에도 그냥 그런 부류인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번 인식한 후로는 이상하게 자신도 모르게 시선으로 그를 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일반 예배가 아닌, 대규모의 전체 예배에만 참석하는 같은 자리의 그녀. 힐끔거리면서 몇 번 관찰해본 결과, 늘 한쪽 구석에 그림자처럼 앉아 누구와 한 번도 대화하는 법이 없더랬다.
고개를 조금 수그린 탓에 긴 머리칼이 마치 미사보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더 가까이 보고 싶은데 아마 실례겠지? 자칫 음침해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때마침 머리 위쪽에 위치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타고 새하얀 빛이 내리쬐면서 일순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 생각을 가졌을 즈음.
아.
순간 눈이 마주친다. 불그스름하고 깊은 녹안이 쏘아보듯 자신을 바라봤다. 저 아래에서부터 스밀스밀 올라오는 혐오감의 눈빛. 당장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포식자의 음울한 시선에 순간 소름이 돋은 앤디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한없이 자애로웠던 찬송가는 이미 귓가에서 별 효력을 가지지 못한 지 오래였다. 마치 낙인이라도 찍힌 듯 마주했던 시선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아서, 연신 마른 입술을 핥아 올려야만 했다. 그리고 한참이나 쿵쾅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다시 돌아봤을 때에는, 마치 꿈이라도 꾼 듯 자신의 기억 그대로 머리카락에 가려진 옆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요즘 참석 태도가 불량하시던데."
미사보도 안 쓰고. 하딘은 석상처럼 앉아있다가 모든 사람이 예배당을 빠져나갔을 즈음, 느긋한 발걸음과 함께 제게 건네는 말소리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답한 앞머리를 쓸어올리고 허리를 곧게 편다. 재수 없는 금발 머리. 몸을 돌리면서 제 뒤쪽에 서 있는 사내가 있던가 말던가,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스쳐 지나간다. 일방적인 무시에도 불구하고 뒤따라 들려오는 음성이 태연하기까지 했다. 차가운 침묵 속에서 매끈한 대리석과 구두 굽이 부딪치면서 또각, 또각. 일정한 소리가 맴돈다.
"어차피 처음 약속대로 참석만 하면 되는 일 아니니."
"그렇게 믿음이 부족해서야, '그 분'이 도와주시겠습니까?"
정면만 곧게 향하던 하딘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홱 소리 나게 돌아보며 사내를 찢어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살기가 엿보이는 표정에도 사내는 태연하게 웃을 뿐이다. 믿음? 웃기지도 않은 소리!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 있는지 알면서도 같잖은 소리를 지껄이는 걸 테다. 여기서 화내는 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당사자를 즐겁게만 할 뿐. 무어라 대꾸조차 하지 않고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짓씹으면서 거칠게 걸음을 옮긴다.
따라오던 사내는 단순히 약 올리려는 목적이었는지, 한참을 걷고 있으니 인기척은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혼자가 된 하딘의 머릿속으로 반쯤 강제로 참석한 전체 예배에서와 조금 전에 사내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빙빙 돈다. 고통은 희망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더 간절히 소망하세요. 스스로를 구원하세요…. 곱게 포장된 말 뒤에 숨겨진 뜻을 아는 하딘으로서는 그러한 교리를 포함하여 깨끗하게 정돈된 바닥과 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창틀. 성스러운 조각상들이 전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괴로운 것은 그 속에 거하는 자신이었다. 저들과 다르지 않게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있는 본인이다. 비웃으면서도 아닌 척, 누구보다 부질없는 미래를 소망하지. 흔들리는 치맛자락을 움켜쥐면서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이게 다 너의 탓이야, 잭 더 리퍼.
'잭'은 죽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정확한 원인은 파악할 수 없었다. 애초에 지난 세기의 영혼이 지금 시대에 부활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이레귤러였으니까. 모든 것이 변수였으며, 어떠한 공식 또한 그에게 온전히 맞을 수 없었다. 어쩌면 타인의 육체를 빌려 호흡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가 '잭 더 리퍼'라는 영혼에게 허락된 시간이었던 거겠지.
하지만.
하딘은 인정할 수 없었다. 아직 그는 이 무대에서 내려가서는 안 되었다. 연금술사 유하딘이 보여줄 세상을 더 보아야 했다. 왜냐하면……. 됐어. 이제 와서 이유가 무어 중요할까. 단 하나. 자신이 납득할 수 없으니까. 그것뿐이야. 언젠가 네가 했던 말처럼 학자는 끊임없이 가설을 세우고, 증명하기를 좋아하는 족속들이니 이러한 행동도 당연한 것이다. 이제는 있지도 않은 자신의 '이해자'에게 해명하듯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납득시켰다.
안타리우스는 불행의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 집단이다. 슬픔에 기생하는 족속들. 결핍을 앓고 있는 하딘에게 그들이 접촉했던 것도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다. 놀라운 타이밍에 줄곧 이 순간을 기다려온 건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불행이라. 그를 잃고 자신은 불행했나? …글쎄. 이러한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서로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만났다는 점이다. 제게 소망하는 '기적'을 만들어낼 환경과 지식을 제공해주는 대신, 자신은 시간과 능력을 집단에 바쳤다. 안타리우스는 자선사업가가 아니기 때문에 응당 그에 한하는 대가를 요구해왔으니까. 오만한 연금술사는 누군가의 아래에서 몸을 수그리고 있다는 것 자체에서 이미 자존심을 짓밟혔다. 신앙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그가 약속대로 전체 예배만큼은 꼬박 참석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뻣뻣하게 구는 자신을 조롱하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괜찮다. 모욕 따위는 그저 넘어갈 수 있었다.
잭. 고작 한 음절의 단어를 내뱉고 하딘은 바로 후회한다. 빌어먹을 테디베어. 이런 마음은 그리움일까, 아니면 불쾌함일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면서 가볍게 도리질 쳤다. 상념을 떨치고 하나의 목적을 향해 불태우는 것쯤은 익숙했다. 여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그러했으며, 지금은 단지 목표만 바뀌었을 뿐이다. 하딘은 걸음을 조금 더 빨리하여 복도의 끝,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을 밟았다.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습한 냄새와 함께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착각이 들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은 제게 지나치게 친근했다.
* * *
"내 머그잔이 어디있지?"
제법 아끼고 있던 매끄러운 잔이 보이지 않자, 두리번거리면서 테이블을 툭툭 쳤다. 혼잣말처럼 들리지만 실은 불친절한 동거인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평소보다 휑한 부엌이 조금은 볼품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책을 읽고 있던 질문의 대상자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엊그제 네가 던져서 깨트렸잖아."
마치 오늘 날씨가 어떻다고 말하듯 평온한 어조였다. 내가 그랬나? 하딘은 핀잔으로 들릴 수 있는 말에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게 어떤 모양이었더라. 나름 아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다시 구현해보려니 자세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컵 하나인걸. 물건의 가치는 고작 그 정도다. 하딘은 결국 건조대에 올려진 다른 컵으로 냉수를 찾아 마셨다.
하딘이 기분이 나쁜 이유는 나름 아꼈다던 물건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갈증을 해소하고 난 뒤에는 슬리퍼를 일부러 소리 내서 끌며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는 동거인에게로 향했다. 거친 인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페이지나 팔락거리던 그는 하딘의 그림자가 자신을 반쯤 가렸을 즈음에야 겨우 고개를 든다. 무표정. 하딘은 이따금 그 덤덤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흡족했던 적이 있긴 한가? 사실은 모르겠다.
"그래서. 쥐새끼처럼 내 과거를 봤던 기분은 어때. 즐거웠니?"
의도적으로 비꼬는 어투를 내뱉으며 턱 끝을 조금 치켜들었다. 항상 미끄러지듯 의뭉스럽게 놀리던 평소의 하딘과는 다른 대화법이다. 잭은 그러한 반응에 화가 나기보다는, 어린아이가 자신의 토라진 마음을 알아주길 원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꺼내면 그때에는 겨우 묶어놓은 평화가 깨질 것이 뻔한지라 속으로만 삼켰지만.
하딘과 잭이 동거라는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에서 생활한 지도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물론 그 시간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애초에 불협화음 같은 만남이었다. 누군가 잭에게 하딘에 대해 질문한다면, 동정할 가치조차 없는 마녀라며 답지 않게 박한 평가를 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래. 처음으로 클리브 스테플의 힘을 빌려 연금술사의 기억을 엿보았던 날부터.
잭은 하딘에 의해 몸이 회복되면서 본래 육체 주인의 감각을 느낌과 동시에 종종 제어를 잃은 사이코메트리에 골머리를 싸매곤 했다. 물론 그런 변화를 하딘에게 바로 말하진 않았다. 그건 일종의 반항심이기도 하다. 자신의 위에서 군림하려는, 하딘을 향한 작은 불만표출. 그러나 능력의 횟수가 쌓일수록 반항심보다는 궁금증이 더 커졌다.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는 완벽주의자 연금술사의 속내는 과연 어떠할까. 무엇이 그를 벼랑 끝까지 내몰았을까. 하딘은 본디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편이 아니었으니, 모를 수밖에 없지 않나. 궁금증이라니. 인간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얼마 만인지. 그래서 마치 보물이라도 찾아내듯 하나씩 들춰보기 시작한다. 단편적인 물건의 기억밖에 읽을 수 없었지만, 하딘은 서랍 깊숙한 곳에 손때묻은 물건을 보관하곤 했으니까.
짧은 즐거움은 후에 하딘에게 들킴으로써 종료되었고, 갖은 비난이 날아들어 왔지만 잭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도 자신을 쥐고 흔들었으니, 자신 또한 그럴 권리가 있지 않은가. 언젠가 봤던 기자의 행동을 토대로 되레 뻔뻔하게 굴었고, 예견했던 대로 내면을 들킨 하딘은 처음으로 잭에게 몹시 분노한 모습을 보였다. 그건 이미 지나간 기억을 훔쳐보거나 꾸며진 모습이 아닌,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유하딘이라는 인간의 생생한 감정이었다.
그 여파로 집안은 태풍이 휩쓸고 간 듯 난장판이 되었지만…. 비밀을 들춰본 값치고는 제법 싼 대가이지 않은가. 잭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짐작하고, 하딘에게 앉으라는 듯 가볍게 턱짓하자 가까운 곳에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아 어디 말해보라는 표정으로 다리를 꼬았다.
"나쁘지 않았지. 관람객이 나 하나였다는 점이 더더욱 마음에 들었고."
"재수 없는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어쩌면 그 기자보다도 질이 나쁘겠어."
적어도 클리브 스테플은 아닌 척하지 않았으니까. 이죽이는 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하지만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나온 하딘은 답지 않게 홀가분해 보였다. 짜증을 섞여 있는 어조임에도 그것이 자신의 상태를 가리기 위한 얄팍한 가면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렇게 목적어를 정확하게 짚지 않고 주변을 빙빙 도는 대화를 하는 이유도. 하딘은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을 때 평소보다 더 자신의 속내를 숨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알맹이가 없는 대화를 더 이어가지 않는 대신, 외눈을 굴려 또렷한 시선을 마주 봤다. 욕망으로 타오르는 선명하고 반짝이는 녹안. 예로부터 녹색은 질투의 상징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누구보다 생동감을 담고 있다는 의미도 되었다. 문득, 하딘의 눈을 제대로 바라봤던 횟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럴 상황조차 없었기 때문에 당연하겠지마는. 잭이 침묵하자 하딘 또한 비틀린 채 떠들던 입술을 꾹 다문다.
잭은 말재주가 퍽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기 생각을 내뱉는 행위를 조심스럽게 여겼다. 이건 하딘 또한 몰랐을 것이다. 기존의 둘은 서로 상처 주지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기만 했다. 줄곧 승자 없는 싸움을 지속했지만, 지금의 잭은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스스로 낯설게도 하딘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말을 고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침묵이 길어져 하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을 즈음 느릿하게 대꾸한다. 수많은 생각의 가지를 거쳐서, 여태 그의 기억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이었다.
"너를 이해해, 하딘."
난데없는 대답에 하딘의 치켜뜬 눈썹이 둥글게 휘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느니, 제대로 설명하라느니 하는 반문은 없었다. 영민한 하딘의 두뇌는 잭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곧바로 알아챘으며, 그 대답은 방 안에서 혹은 지금 이 순간마저도 생각하고 있던 작은 불안과도 직결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진실 여부를 살피는 듯한 표정으로 잭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더니 경계하는 기색으로 꼰 다리를 풀었다. 긴장이 팽팽한 침묵임에도 불구하고, 하딘의 행동에 잭은 결국 짧게 웃어버린다. 이건 마치 맨 처음 잭과 하딘이 만났던 그 날과 정확하게 상반된 입장이지 않은가. 막 깨어나 혼란스러워하는 잭과 여유롭게 조건을 제시하던 하딘. 그리고 진위를 확인하며 긴장하는 하딘과 이제는 후련해진 잭. 세상일은 참 우습기 짝이 없지.
"미리 말하지만 비웃으려는 게 아니야."
"그럼……."
"물론 거짓말도 아니지. 내 말에 숨겨진 진의는 없어. 그대로 듣고 납득하면 돼."
그냥. 그저. …단순히 유하딘이라는 존재가 이제야 인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지만 아까처럼 경계하진 않았다. 잠시 고민에 빠진 얼굴로 제 입술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잭은 복잡하고도 위대한 연금술사를 마음 넓게 기다려주기로 했다. 과거의 살인마에게 시간은 남아도니까.
"너는…."
잠시 말을 멈췄다. 떠오른 가정이 스스로도 황당한지 웃음을 삼켰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사랑하기라도 하니?"
"글쎄."
잭의 시선이 하딘에게 닿는다. 반대로 그가 물었다.
"하딘, 너는?"
허공에서 두 쌍의 눈이 마주쳤다. 하딘은 닫혀있는 잭의 왼쪽 눈마저 오롯이 저를 응시하고 있다는 어떠한 사실을 직감한다. 그리고 입술을 천천히 달싹였다.
* * *
건물 지하에 위치한 연구실은 커다란 메인 홀과 여러 가지 작은 방으로 구분되어 있다. 평소라면 연구원들로 부산스럽겠지만, 지금은 하딘이 다 쫓아낸 터라 삭막하게 텅 비어있었다. 히스테릭한 행동에 연구원들은 '저래봤자 쫓겨나면 아무 이유도 없는데.','또 시작이네.' 하고 불만스레 투덜거렸지만, 연구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딘이었기 때문에 더 무어라 하지 않고 빠르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딘은 그들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물건을 건드려보다가 터벅터벅, 더 안쪽으로 걷는다.
안타리우스는 고명한 지식인들을 모아 능력자에 관한 연구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는지, 하딘에게도 비슷한 지시를 내렸다. 능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강화시킬 방법은 무엇일까. 혹은 능력자와 일반인의 구성요소는 무어가 다른가. 수많은 가설을 세우고, 폐기하기를 반복하면서 하딘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의미 없는 목표에 매달렸다. 그가 버티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무대에서 하차한 '잭 더 리퍼'를 다시 한번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유리관을 스쳐 지나가면서 주먹으로 퉁, 친다. 이런 가짜들이 아니라 나는 '진짜'를 깨울 거야.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유전자로 만든 단백질 클론들이 산소관에 매달린 채 뽀글거렸다. 연구실의 푸른 조명이 뺨에 맺혀서 흡사 시체처럼 보였다. 하딘은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진 듯 진저리를 치며 손을 치우곤, 조금 빠르게 움직였다. 가장 깊은 쪽.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공간.
안타리우스에게 협력하는 대가로 제법 괜찮은 대우를 받았고, 이 장소도 그중 하나였다. 안으로 들어서며 점점 걸음이 느려진다. 중앙에 새카만 관이 하나 놓여있는데, 거기에는 '하딘의 잭'이 누워있었다. 마치 잠에 빠진 듯, 평온한 표정과 굳게 닫힌 눈. 혈색이 도는 뺨이 시선을 이끈다. 잭이 숨을 거둔 직후, 하딘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육체를 일시적으로 정지시켰다. 온기가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완벽하지 않았고,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야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이 순간이었지. 잭을 둘러싼 알약 형태의 영문 모를 기기들이 웅웅거리며 작은 소리를 토해낸다.
누워있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잭의 흉터 자국을 더듬거렸다. 그가 살아 숨 쉴 적, 하딘이 가지던 습관 중 하나였다. 마치 손끝에 하나하나 새기듯 쓸어보며, 잭 더 리퍼라는 사내의 과거와 고통을 만끽하곤 했다. 잭은 무슨 반응이었더라. 처음에는 손길을 피했지만, 나중에는 익숙한 표정으로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하딘은 그러면서도 항상 묵묵히 저를 보던 방향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차단되어 있던 비밀스러운 왼쪽 눈을 열어보고 싶었다. 눈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라고 하잖아? 외눈인 너는 마음이 반쯤 무너졌다는 뜻이니, 아니면 내게 무언가 숨기고자 하는 거니? 질문하고 싶지만 답할 사람은 긴 잠에 빠져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떠한가. 나중에 물어보면 되는 일인데. 손끝은 흉터를 지나 잭의 뺨을 타고 이내 도톰한 입술 위를 거닐었다. 이 입술로 제게 말했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해한다고. 이 분노를, 욕망을, 폭풍 같은 불꽃을 긍정하노라고.
하지만 그게 진실이라면.
너는 등을 돌려선 안 됐다. 제 옆에서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지켜봐야 했어!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던 것처럼 조심스레 더듬던 손이 더 내려와 목을 감쌌다. 분노로 손끝이 하얘지도록 꽉 쥔다. 감히 내게서 도망쳐? 그렇다면 네 낙원의 문을 열어서라도 끄집어 내리라. 이해를 논해놓고 홀로 제게서 도망쳐버린 너의 휴식을 짓밟아버리고 말겠다. 아아, 불쌍한 테디. 처음부터 끝까지 네게 선택권은 없었어. 이런 나를 원망하니? 끔찍하니? 너라면 기꺼이 받아주지. 그것이 나에게 닿는 온전한 너의 감정이라면.
언젠가 잭은 하딘에게 물었다. 흔들리지 않은 눈빛으로 또렷하게 마주 보면서. '너는?'
…나는.
손에 힘을 풀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 물음에 이제야 답하노라. 그리고 이것이 내 대답이다. 실로 폭력 같은 애정이었다. 하딘은 우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라는 사람을 사랑하기로 했다면, 이 정도는 짐작했어야지. 너도 결국 납득하고 말 것이다.
때마침 모든 준비가 끝난 참이었다. 오늘을 위해 모든 사람을 내쫓았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나만을 위한 순간이니까. 손을 뻗어 근처에 있는 낯선 기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내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에 장식물처럼 놓인 기기들의 뚜껑이 열린다. 그 안에는 사람이 각 한 명씩 들어가 있었는데, 나이와 성별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모르고 가만히 누워있는 그것들을 무감각한 표정으로 스쳐 잭이 누워있는 관에 더 가까이 붙는다.
연금술사는 끝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 답을 신이 가장 사랑한 피조물에게서 찾기로 한다. 기기들이 하나로 연결된 관을 짚고, 주머니에서 투명한 액체가 담긴 주사기를 꺼내며 그대로 팔뚝에 박아 주입했다. 오랜 시간 집단 안에서 인내하면서 꾸준히 연구해온 결과물인 증폭제였다. 사이퍼로서의 하딘은 단순히 불꽃이나 물줄기를 피워내는 능력이 아닌,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능력이기에 정제하여 만든 증폭제의 정확한 효능과 부작용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하딘에게 더는 시간이 없었다. 거칠게 내리꽂은 주사기의 몸체에 피가 스며드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피스톤을 눌렀다. 이러니 본인의 몸을 실험체로 사용했던 오래된 과거가 스쳐지나간다.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한계까지 몰려 무엇보다 절실한 마음. 어쩌면 자신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게 아닐까? 아니. 아니야. 시도하지 않고 단정내릴 수 없다. 무엇보다 간신히 붙들고 있는 온기가 언제 차갑게 식어버릴지 몰라. 형체 없는 불안감이 발끝에서부터 잠식하는 것도 이제는 끔찍하다.
올라오는 토기를 참으며 관을 짚고 있는 손에 힘을 주자, 이내 새하얗고 눈부신 빛이 튀었다. 사고가 일시적으로 확장되면서 하딘이 그동안 담아두었던 수많은 지식이 물에 풀어지듯 한데 모여 녹아들었다가 뒤섞이기를 반복한다. 몸이 덜덜 떨리고 뇌를 스펀지처럼 쥐어짜는 듯 머리가 몹시 아파졌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는 착각이 들었을 즈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비명을 지르더니 새파랗게 타오른다. 하딘은 고통 속에서도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아하하. 이내 소리내 웃음을 터트렸다. 이유도 없이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무언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때가 늦었음을 스스로 짐작하고 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윽고 불꽃이 모두 사그라들었을 즈음, 소란이 뚝 그치면서 공간에는 순식간에 고요가 찾아왔다. 하딘이 눈을 깜빡이니 붉은 핏줄기가 뺨을 타고 투둑 떨어진다. 실핏줄이라도 터진 모양이지. 대수롭지 않게 손등으로 문지르고 상체를 잭에게로 바짝 숙였다. 그렇게 염원했던 순간이었다.
조심스레 이마를 쓸어주며, 흙으로 육신을 빚고 마지막으로 숨을 불어넣었던 여와처럼 천천히 입술을 포갠다. 일련의 행동들에서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일어나, 네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마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열쇠가 되듯 굳게 닫힌 눈꺼풀이 애처롭게 파르르 떨렸다. 상체를 크게 들썩이며 숨을 들이킨다. 이내 긴 날숨.
드디어 비밀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yam_hadinS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