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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밀레이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갔다. 허공에 뻗은 사밀레이나의 주변으로 주홍색 실이 모여들더니, 날렵한 모양의 활과 화살을 만들어냈다. 시위를 당긴 그녀의 주홍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불사조의 능력이 바뀌었다. 그녀는 ‘원형’으로 돌아갔다. 이 세계에 부자연스럽게 떨어지던 그 순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플리아나스의 사지는 온갖 실에 칭칭 감겨 있었다. 특히 목에 집중된 그 실은 금방이라도 그녀의 얇고 긴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

조정자의 눈이, 실재하지 않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플리아나스가 한쪽 눈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나는 ‘불사조’ 따위가 아니야. 나는 원세계의 열세 번째 뿌리고, 여신의 계승자야. 이 상자는 내가 가진 권능으로 잠갔지. 나는 이 상자를 ‘복원’하는 존재야. 그러니까….”

“목숨이군요.”

 

루드비히가 뿌리를 피해 천천히 앞서 걸어갔다. 플리아나스가 눈을 감자 노란 눈동자들이 루드비히를 따라가며 깜박, 깜박, 비웃듯이 휘어진 눈 속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며 웃었다.

 

“저 그릇에 당신의 목숨을 넣어야 열리는군요. 그럼 당신이 ‘복원’하는 일을 멈출 테니까.”

“맞아. 내 피를 담아. 가득 채우면,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될 거야.”

“그렇게 할까요. 당신이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그 뜻을 위해서.”

“할 수 있어? 내가 플리아나스가 아니라고 생각해?”

“아니든, 맞든 다르지 않다.”

 

벨져가 검을 뽑아 들자 곁에서 서늘한 날붙이의 소리가 하나 더 들렸다. 플라네타리스는 몸을 도약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웃기지 마. 어떤 이유로든, 당신들은 내 친구를 죽일 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할까, 플라네타리스. 이대로 얌전히 탑을 떠나 돌아갈까? 이 자료를 그대로 두고서? 이성적으로 생각해. 자료를 파기하지 않으면 전쟁은 끝나지 않아. 다 죽게 되는 것을 보고 싶어?”

“글쎄…세상이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야. 내 쌍둥이 언니는 그걸 신경 쓸지 모르겠지만, 한 사람의 목숨을 바쳐야만 구해지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구해지지 않는 게 나아.”

“말이 안 되는 논리야.”

“당신 논리는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저건 플리아나스가 아니야. 본능만 남은 껍데기지.”

“그래. 맞아. 본능만 남았어. 그동안 죽기 살기로 억눌러 왔던 본능과 탐욕이. 한 번도 저 본능과 탐욕에 말을 걸어본 적은 있었어? 모두가 외면했던 것들이야. 그동안 잘도 부려먹었잖아. 봐, 하나만 묻자. 플리.”

“응, 필리.”

“죽고 싶어?”

“아니.”

 

플리아나스가 눈을 다시 떴다. 벨져가 돌격하고, 플라네타리스가 막아섰다. 벨져의 목을 노리는 칼날을 사밀레이나의 화살이 쳐내고, 그녀가 플라네타리스에게 접근하자 뿌리들이 움직여 사밀레이나를 방해했다.

 

“루이스. 뿌리를 얼려!”

“…….”

“한눈팔지 마! 루드비히, 네가 해. 뿌리를 태워!”

“…….”

 

루드비히는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플리아나스의 금색 눈동자는 비인간적인 광채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크리스털 잔에 팔꿈치를 걸치고 제 긴 머리를 적당히 빗어 넘기며 웃고 있었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이. 이 목숨을 거둘 수 있는 이를 기다리겠다는 듯이.

 

“모르겠습니다.”

 

벨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모르긴 뭘 모르지?”

“정말로, 모르겠다고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갈색 눈동자가 무료한 듯 가라앉아 버렸다. 루드비히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당신은 이성적인 편이었지요. 변덕스럽고 충동적이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이 베풀 친절의 범위에서나 그랬을 뿐. 당신의 본능을 좇은 적은 없었어요. 당신의 이성은 다 어디로 녹아 사라졌습니까.”

“버렸지.”

“왜?”

“살아남기 위해서.”

 

플리아나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자세를 살짝 틀자 붉은 깃털로 된 드레스가 일렁거렸다.

 

“무엇을 선택해도 당신을 되돌려받을 수 없을 것을 압니다.”

“주사위는 던져졌어. 나는 돌아오지 못해, 헌터.”

“남은 것은 그저 누가 당신을 죽이느냐예요.”

“당신이 할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었습니까?”

“사랑하니까 당신이어야지. 어때? 루드비히 와일드. 내 목숨을 거둬, 당신 손으로.”

“그게 정말 당신의 뜻입니까? 살고 싶다고 했잖아요.”

“맞아. 나는 죽는 게 두려워.”

 

플리아나스가 눈을 내리깔자 루이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모순적이야, 플리. 왜 그러는 거야?”

“사람은 원래 모순적이야. 나는 항상 그랬어, 루이스. 언제나 죽고 싶었고, 딱 그만큼의 무게로 살고 싶었어. 삶과 죽음은 내게 크게 다르지 않았어. 사랑하기 때문에 살았을 뿐이야. 그런데, 그저 사랑하는 것만으로 족할 수 없다면?”

“…….”

“왜 화를 내? 당신을 위해서였어. 그게 화가 나? 당신은 늘 연합을 위해 앞서고, 희생하면서, 나는 안 돼? 우리의 희생은 다른 거야?”

“…….”

“내 긍지는 죽음에 있고, 본능은 삶에 있어.”

“그래. 그렇게 된다면 내가 너를 죽이겠다 하였지. 삶보다 고귀한 죽음을 위해. 네 스승이 되던 날, 나는 네게 맹세했다. 기사의 자격을 걸고.”

 

벨져 홀든이 두 검을 모두 뽑아 휘두르자 플라네타리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분노로 일그러졌다.

 

“헛소리하지 마. 목숨보다 귀한 긍지 같은 건 없어. 그건 허황한 명분이야. 개소리라는 뜻이지. 플리아나스에게 손 하나 까딱해 봐. 다 죽여버릴 거니까.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저 계단을 내려가.”

“우리가 돌아서서 내려가면, 그녀는 어떻게 돼?”

“그냥 여기에 있겠지. 상자를 지키며, 본능만 남은 채로.”

“그걸 삶이라고 부를 수 있나?”

“나는 당신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 말을 끝으로 벨져와 플라네타리스는 격돌했다. 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지럽게 움직였다.

그 소란스러운 모습을 보던 루이스는 플리아나스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저 이 그릇을 둔 채 탑을 통째로 무너뜨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함께 떠나자. 어때? 다시 도망가는 거야. 우리가 먼저 도망치고, 이걸 열 방법을 고민해 보자. 아예 파괴하는 건 어때? 우리는 이 정보를 폐기하고 싶은 거지, 필요한 게 아니잖아.”

 

내내 루이스의 곁에서 침묵하던 트리비아가 거들었다.

 

“그래, 왜 떠나지 않았어? 잠금장치 같은 것도 없었잖아. 그냥 계단을 타고 내려오기만 하면….”

 

그러자 플리아나스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높게 찢어지는 웃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정원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지경이었다. 그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는 거의 울부짖는 것에 가까워서, 서로의 급소를 노리며 죽일 듯이 달려들던 벨져와 플라네타리스도 일순 움직임을 멈추고 플리아나스를 바라볼 정도였다.

플라네타리스가 벨져의 짧은 검을 쳐내자 부메랑처럼 날아간 검이 천장을 깨뜨렸다. 투명한 유리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별빛을 머금은 비가 후두둑, 후두둑,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알았다. 그녀는 나가지 않은 게 아니다. 나가지 못한 거다.

 

“나는 능력 개방 실험을 받고, 이 능력을 손에 얻자마자 관련된 연구원들을 모두 죽여버렸어. 그리고 이 정보를 손에 거머쥐었지. 그들은 나를 통제할 수 없었고, 이 탑에 나를 유폐시켰어. 당신들이 나를 구하러 올 것을 알았기에, 나는 그때까지 이 정보를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아야 했어. 그럴 생각이었지. 그러니 나는 의사에게 이 ‘그릇’을 만들어 달라고 했어. 내 목숨이 아니면 열 수 없도록. 맞아. 이건 내 이성이 내린 결단이야. 내가 빚어낸 마지막 전술이지. 이건 복잡한 장치야.”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야. 플리. 왜 그것을 두고 떠나지 않았냐고 물었어. 네 목숨을 넣지 않으면 열 수 없는 특수한 장치라면서. 그럼, 네가 멀리 떠나면 오히려 안전하잖아. 왜 이곳에 있어? 내게, 아니, 우리에게, 연합으로 돌아오면 됐잖아. 그러니까 왜….”

 

루드비히 와일드는 그 모든 대화를 흘려들으며 플리아나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횃대도, 새장도 없이 날지 않는 불사조. 그의 붉은 새. 그녀는 피눈물을 문질러 닦으며 낮게 웃었다. 금색 눈동자가 자조적으로 가늘어지자 루드비히는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떤 예고도 없이 그녀의 붉은 드레스 자락을 들췄다.

 

“말도 안 돼.”

“…….”

 

플라네타리스는 검을 떨어뜨렸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망연한 표정으로 플리아나스를 보자, 그녀의 친구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발목 아래로는 비어 있었다. 두 발이 있어야 할 곳이 비어 있었다.

 

“의사는 대가를 요구했어. 이 그릇을 만드는 데 발 하나를 바쳤고, 이미 만들어진 영웅의 클론을 몰래 폐기하는 조건으로 나머지를 바쳤어. 내 ‘복원’의 권능을 궁금해했거든.”

“…….”

“알아. 나는 죽을 수밖에 없어. 외롭고 고통스러웠어. 뭐가 됐든 나는 죽겠지. 피 흘리는 다리로 계단을 기어 내려가다 지쳐서 죽어버리든, 이 지긋지긋한 고통에 시달리다 그만 미쳐서 죽어버리든, 안타리우스가 나를 통제할 방법을 찾아 갈기갈기 찢은 뒤 그릇을 채워 자료를 회수해 가든. 죽음이 강해지자 삶의 본능이 강해졌을 뿐이야. 인정하기 싫었지만…삶은 생명의 본능이더군. 그것도 가장 밑바닥의. 가장….”

“비참하고, 절실하고….”

“맞아. 그러니까…나를 죽여. 나는 지쳤어. 순순히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었어. 행복하고 싶었어. 죽을 만큼 힘들었어. 그래도 극복하고 싶었어.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내 이기심이겠지만, 그래도 당신들을 위해서니까. 당신들도…나를 도와. 나를 죽여. 내 본능을 꺾고, 나를 이겨서, 내 이성이 헛되지 않게 해. 그게 당신들이 믿는 ‘플리아나스’라면. 선택해. 나는 고르지 못해. 나는 고를 수 없어.”

“나는 못 해.”

 

플라네타리스가 말했다.

 

“나는 너를 지키겠다고 했어. 그건 네가 선이든, 악이든 상관없어. 그러니 나는 너를 죽이지 못해.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럼 루이스, 당신이 할래?”

“…미안해. 나는 못 하겠어….”

“트리비아.”

“그건 내 소관이 아니야, 플리아나스. 너도 알다시피.”

“루드비히. 당신이 할래?”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차라리 이곳에서 당신과 더 살거나, 당신을 안고 도망쳐 버리겠죠. 지금이라도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당신의 본능은 기뻐하나 이성은 서글퍼할 겁니다. 무엇도 해결할 수 없고, 당신의 전술은 당신의 도주로 실패하게 되었을 테니까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 당신의 무엇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야. 벨져 홀든.”

“…….”

“스승님.”

 

불사조가 기사를 부르며 웃었다.

 

“약속했잖아? 나를 죽이기로. 약속을 지켜. 당신은 기사야.”

 

벨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년이 천천히 다가가자 플라네타리스의 몸이 긴장으로 바짝 굳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벨져를 죽이고 싶다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사밀레이나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기다려요.” “이거 놔, 오귀스트. 너부터 죽여버리기 전에.” “기다리라고요. 벨져의 눈에 살의가 없으니까.” 사밀레이나의 속삭임에 플라네타리스가 사밀레이나를 쏘아보았다. 다시 회녹색으로 가라앉은 시선이 차분하게 플라네타리스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조금의 거짓도 들지 않았다.

 

“내 맹세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플리아나스.”

 

모든 이들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벨져가 말했다. 그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너를 죽이지 못해. 내 생애 첫 제자인데, 어떻게 너를 내가 죽일 수 있을까. 나는 네가 목숨마저 바칠 만큼 소중히 여겼던 긍지를 존중하나, 너 또한 소중하다. 그러니…이 검으로 너를 벨 수 없어.”

검은 장갑을 낀 벨져의 손에서 두 자루의 검이 추락했다. 쨍강. 날붙이가 바닥에 떨어지자 뿌리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그 번쩍이는 검을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 뜬 눈동자들이 분주하게 벨져를 탐색했다. 그러나 청년은 그 어떤 것에도 시선을 주지 않고, 금색으로 형형히 빛나는 플리아나스의 두 눈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네게 긍지를 지키는 법을 알려주었다. 가장 어려운 순간, 가장 힘든 순간, 가장 괴로운 순간에 옳은 선택을 하는 법을 가르쳤다. 동시에 나는 네게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었지. 이성과 본능의 선택이 다르다면, 그건 우리 같은 일개 타인이 원하는 것을 골라 선택할 것이 아니야. 답은 네가 내려야 한다.”

“그러니까, 내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손 떼겠다?”

“내가 너를 찌른다고 해서 너는 홀가분해지지 않아. 너는 책임을 전가한다고 행복해지는 사람이 아니니까. 네게 가벼움은 곧 두려움이지. 책임과 의무가 없다면 너는 삶에 내려앉지 못하고 부유하게 돼. 그러니 너는, 오롯이 네 선택을 해. 너를 위한 선택을 해.”

“나를 원망하지 마.”

“누구도 너를 감히 원망하지 않아. 네 삶도, 죽음도, 이성도, 본능도, 모두 너의 것이다.”

“내 모순을 두려워하지도 마.”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네 모순이 아닌, 네가 이토록 괴로울 때까지 너를 홀로 둔 우리지. 이 순간마저도 네게 기대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이 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나약함이지. 우리는 그것이 두려워.”

“살고 싶었어.”

“삶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지지? 플리아나스. 네 삶은 무엇이지?”

“긍지, 약속, 그리고 추억.”

 

기사는 무릎을 꿇고 앉아 검을 쥐어, 다리를 잃은 불사조에게 건넸다.

 

“너는 영원히 살게 될 거다.”

“그렇구나.”

영원 같은 침묵이 흘렀다. 모든 눈동자가 눈을 감았다. 피에 젖은 플리아나스의 속눈썹조차 잠시간 닫힌다. 그녀는 숨조차 쉬지 않고 찰나를 견뎠다.

그녀는 스승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벨져가 천천히 물러나자 루이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바싹 말라 갈라진 아랫입술이 윗입술과 붙었다가 떨어졌다. 그러나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영웅은 입안으로만 속삭였다. 안 돼. 오감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는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안 돼. 안 돼, 안 돼. 그렇게는 안 돼. 안 돼, 제발. 안 돼. 안 돼….

플라네타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친구의 죽음을 직감한 그녀는 이를 바득 갈았다. 잃고 싶지 않았다. 죽음은 그 생명을 세상에서 지운다. 긍지? 약속? 추억? 생존이라는 기반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생자들이 공유하는 미련에 불과하다. 그녀가 연합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고도 플라네타리스가 플리아나스를 말리지 않은 것은, 그녀가 죽지 않는 새였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해도 끝내 죽지 않을 것을 믿었기에, 그녀가 원하는 만큼 날개를 펼치고 마음껏 날도록 두었던 것이다.

플리아나스가 검을 쥐었다. 루이스의 몸이 튀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트리비아가 그것을 막았다. 그녀는 제 연인을 뒤에서 힘껏 끌어안았다.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지도록 그녀는 루이스를 막았다.

“가지 마, 루이스. 플리아나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 그녀는…지하연합의 일원이야. 이건 전술가의 선택이야. 우리가 만든 그 어떤 전술보다 나은…결과를, 가져올 거야.”

“당장 놔. 손을 다 잘라 버리기 전에, 사밀레이나 데인 드 오귀스트.”

“잘라. 그래도 안 되는 일이야, 이건. 나는 네 미움이 두렵지 않으니, 너를 막을 수 있는 건 나뿐이겠지.”

 

그녀가 제 머리를 싹둑 잘랐다.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는 단발로 돌아가자 잘려 나간 머리카락―뿌리와 이어졌던―들이 질세라 비명을 질렀다. 끔찍한 비명이 사방에서 울리자 그들은 인상을 쓰며 귀를 틀어막았다.

금빛 눈동자가 녹색으로 천천히 시들어갔다. 빛을 받는 부분만이 금색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처럼 다정해서, 그 눈을 들여다보던 루드비히는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메이는 듯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른다. 그 정원에 서 있던 누구도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루이스는 무어라 말하며 절규했으나, 그가 무어라 했는지 그 자신조차도 몰랐다. 루드비히는 플리아나스의 손목을 잡았고, 손바닥에 닿아 오는 부드럽고 따스한 감각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러자 플리아나스는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벨져는 그 모든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고개를 들어 빗방울 사이로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을 헤아렸고, 차갑게 식어서 떨리는 검사의 손을 조정자 사밀레이나의 손이 찾아와 쥐었다. 트리비아가 날린 박쥐 떼는 나비처럼 날아 플리아나스의 잘린 발을 가려 주었다.

 

“…….”

 

플리아나스가 숨을 거두는 것은 금방이었다. 목숨은 허망할 만큼 쉽게 스러졌다. 평소의 그녀라면 그녀의 신체 능력이 그녀를 멋대로 치료했으니 죽지 못했을 테지만, ‘복원’의 권능을 그대로 가져 통제할 수 있게 된 플리아나스는 달랐다. 그녀는 고결한 죽음을 소망했고, 그 소망이 그녀의 영혼을 영원한 적막 속에 빠뜨렸다.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온전함이었다.

박쥐가 다시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자 사라진 왼쪽 발이 보였다. 자신의 클론과 맞바꾼 그 다리를 보자 루이스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심장을 찔린 맹수처럼 울부짖자 정원의 기온이 순식간에 내려가고, 비는 곧 우박이 되었다. 발밑에 흘러넘치는 희생자의 피가 얼어붙어 새빨갛게 반짝거렸다.

사밀레이나는 손을 흔들었다. 하얀 손이 허공을 지휘하자 그녀의 부름을 받은 바람이 날아와 얼어붙은 피를 동그랗게 잘라냈다. 붉은 구슬들이 모여 하나씩, 하나씩 그릇을 채웠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리자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방법으로 그 죽음을 견디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구슬이 수십 개가 모였다. 수백 개가 모였다. 커다란 그릇이 가득 차자 덜컥, 상자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몇 개의 서류와 물건이 상자에서 굴러 나왔다. 루드비히는 그것을 보지도 않고 빛으로 태워 버렸다. 제 쓸모를 다한 상자가 무너지자 크리스털 잔이 기우뚱 길어졌다. 영원히 녹지 않는 땅 위로 붉은 구슬이 와르르 쏟아졌다.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누군가의 삶처럼. 불사조의 목숨이 쏟아지고 있었다.

구슬 하나가 굴러와 기사의 발치에 멎었다. 그는 그것을 조심스레 들어 보았다. 손아귀에 쥐고 살짝 힘을 주자 그것은 허망할 만큼 쉽게 으스러졌다. 영원한 겨울의 땅 위에서조차도 얼 수 없었던 마지막 온기가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는 여전히 뜨거웠다. 그래서 슬펐다. 그것이 안타까웠다.

루드비히는 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냥꾼의 다부진 손이 숨을 거둔 여인을 안았다. 조금이라도 힘을 잘못 주면 부서지기라도 하듯 조심스러웠다. 그는 불사조의 고요한 품에 고개를 묻었다. 붉은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피를 머금은 그 깃털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가, 쥐었다가, 천천히 놓아주었다.

 

“해가 뜨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해. 전력을 가다듬고, 다음 전쟁을 대비해야 해.”

 

트리비아가 말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하늘은 파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창백한 새벽의 빛이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잘린 손톱 같은 그믐달이 어슴푸레한 존재감을 뽐냈다.

 

“가세요.”

 

루드비히가 말했다. 이제는 동행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듯 단호하고 서늘한 음성이었다.

 

“잠시만 둘이 있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당신들은….”

 

루드비히는 이를 악물었다. 여인의 차가운 이마에 입술을 누르던 그가 애써 제 말을 마무리했다.

 

“전쟁을 끝내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말할 것은 없나?”

 

벨져가 묻자 루드비히가 되물었다.

 

“그녀가 당신에게 무어라 했습니까?”

“…하.”

 

검사가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슬픈, 짜증스러운, 벅찬, 아픈, 자괴감을 느끼는, 그 모든 온갖 감정이 뒤섞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고맙다더군.”

“…고맙다고.”

“그래.”

“만족스러운 선택이었을까요?”

“그녀의 얼굴을 봐. 울고 있나?”

 

피와 눈물로 얼룩진 창백한 얼굴에서, 루드비히는 미소를 읽었다.

 

“아니요.”

“…….”

“아셨습니까, 루이스.”

“그래. 잘 알았어.”

 

눈물을 닦아내며 영웅이 말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심장에서 갓 뽑아낸 피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종전은 우리의 의무야.”

 

 

그들은 탑을 내려왔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헤어졌다.

최후의 봄이 저문 탑에는 태양을 닮은 사냥꾼만이 남아,

영원히 살게 된 새의 마지막을 지켰다.

 

<최후의 봄> Fin.

@pleanas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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