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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톰슨 X 리스 페리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는 릭, 당신에게 부은 눈을 비비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고 서재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산책을 나왔었다. 당신과 자주 산책을 하러 가던 그 공원으로. 잠시 쉬었다 갈까, 해서 앉은 벤치 앞에는 어린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그 움직임에 시선을 맡겼던, 그때였다.

 


"잘 지내는 모양이네, 리스 페리나."

 


얼음장 같은 목소리. 심장이 쿵- 하며 떨어지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에 섬찟 긴장하고 만다. 언제 자신의 옆에 왔는지, 익숙한 로고가 달린 검은색 로브를 입은 자는 그 모습에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린다.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을 져버리고 나왔는데. 행복한가? 그자와."

 


눈을 감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계속 눈을 감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외면하고 있었으니까. 언젠가 그들에게 다시 발목을 잡힐 날이 오리라는 것을 분명 알고 있을 터였다. 도망쳤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쫓기다 후미진 골목에 쓰려져 있던, 그날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때 마주했던 다정한 올리브색의 눈동자와 이윽고 열렸던 게이트의 푸른빛이 스쳐 지나가자 리스는, 다시 눈을 떴다.

 


"그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오. 이제 요구도 할 줄 알게 되고."

"......."

"글쎄. 네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달렸겠지?"

 


그동안 우리라고 가만히 있던 것만은 아니라서. 공간이동 능력자...였지? 우리랑 아주 깊은 관계인 그 자. 네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이게 뭐야? 횡재했다, 싶더라니까. 리스는 입술을 깨물다시피 꾹 닫은 채, 무릎에 올린 손을 덜덜 떨었다. 이 정도로 해둘까. 그 모습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입가를 슬쩍 쓸던 손을 내리며 아량을 베풀 듯 말했다.

 


"정리할 시간 정도는 주지."

 


대신, 네가 스스로 선택한 길인 만큼 이번엔 우리 말을 아주 잘 들어줘야 할 거야. 의외로 네 적성에 맞는 일인지도 모르지. 그럼 조만간 다시 만나자고. 눈앞의 정체 모를 자는 비릿하게 웃으며 오늘따라 말라붙은 피처럼 보이는 홍색의 머리카락을 스치듯 만지고 사라졌다. 리스는 한동안 그대로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   ◈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요즘 아침잠이 부쩍 많아진 리스를 위해 익숙하게 두 명분의 토스트를 만들었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부은 눈으로 배웅인사만큼은 매일 나오는 그대. 간밤에 편히 잤음을 보여주는 리스의 헝클어진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으며 릭은 처음 자신의 집에 왔을 무렵의 리스를 떠올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잠자리에 들어도 악몽을 꾸는지 가쁜 숨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던 가녀린 모습을.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의 집이 편안해졌다고 생각해도 될까, 하는 묘한 뿌듯함에 웃으며 인사를 하고 출근길에 나섰었다. 하지만, 모처럼 야근이 없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온 집 안은 텅 비어있었다. 그녀는 아무 곳에도 없었다. 평소와 똑같은 자신의 집임에도 어딘가 푹 가라앉은 공기에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해 또 어디 산책이라도 가볍게 나간 걸까, 하는 생각으로 애써 무마시켜보려 한다. 한 시간. 두 시간. 이렇게 늦을 리가 없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평소에도 걱정이 되는 사람이었다. 리스는 세상의 모든 것이 편이 되어 준 적이 없음에도, 자기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몸을 움직여 능력을 서슴지 않게 쓰는 사람이니까.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눈을 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언제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다른 사람의 상처를 떠안고 아파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으니....

 


"미안해요, 릭...."

 


리스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보다 그런 리스를 보면서 짓는 자신의 표정에 미안함과 걱정이 얽힌 눈망울을 하곤 했다. 자신은 언제나 늘 무력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때처럼 혹시나. 집에 스스로 돌아오지 못할 정도의 상처를 입고 빛이 들지 않는 어딘가에 혼자 쓰러져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지막 최악의 상황에까지 미쳤을 때, 소파에서 튕기듯 벌떡 일어나진 몸은 빠르게 현관으로 향해졌다. 그 순간, 문이 열려 있는 자신의 서재가 보였다. 항상 닫혀있던 방의 문이. 이상한 기시감에 본능적으로 발걸음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한 발씩 떼어졌다. 쪽지. 책상 위의 쪽지에는, 짧은 단어 하나만이 써져있었다.

 


미안했어요, 릭.

 


릭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보아라! 그리고 믿어라! 너희들의 눈앞에 보이는 존재는, 이 땅의 모든 생명체의 구원을 위해 태어나신 안타리우스의 성인(聖人)이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을 구원해 주기 원하는 뒤틀린 욕망을 알 수 없는 괴성으로 구현화시켰다. 자신을 향하는 것인 걸까. 셀 수 없는 광기 어린 눈빛들을 혼자 받아내고 있는 리스의 두 눈은 그와 반대로 빛을 빼앗기고 있는 듯, 색을 점점 잃어갔다.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자신의 존재가 옅어지는 듯했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여기에, 왜 있는 거였더라. 마치 보이지 않는 실들이 저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그 실은 계속해서 얽히고 얽혀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촘촘했지만, 그만큼 얇기에 분명히 끊으려면 끊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굳이 그래야 할까? 그런 와중에도 본능은 눈앞에 던져지듯 쓰러진 피투성이 사람의 앞으로 향했다. 아직 뜨거운 피가 울컥 나오고 있는 상처에 손을 올렸다. 그 색만큼 붉디붉은 빛이 리스의 손바닥에서부터 뿜어져 나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탄복했다.

 


"보이십니까! 믿음의 힘이! 믿음에는, 구원이 따르리라!"

 

 


보여? 봐. 너를 향한 수많은 구원을 바라는 손길들을. 네가 바라던 일이지 않나? 너는 그냥 이대로, 평소처럼 하던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네 그 능력으로, 아프고 힘든 사람들.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면 되는 거야.

 

곁에서 속삭여지는 말을 들으며 리스는 묵묵히 눈앞의 사람에게 계속해서 능력을 썼다. ...상처가 꽤 깊은 모양이었다. 걸쳐진 신도복의 왼쪽 옆구리가 점점 짙은 빨간색으로 물들어갔다. 대답 않는 리스를 보며 흐음, 곰곰이 무언갈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속삭이기 시작한다.

 

좀 더 기쁘게 받아들이는 게 어때? 지금 네 눈앞에 안타깝게 쓰러져 있는 사람이 '그 남자'가 아니길 바란다면 말이야.

 

리스는 그 말에 홱 돌아보며 지금껏 살면서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왔고 눈은 분노를 담아본 적 없는 듯, 지리멸렬하게 흔들렸다.

 

하하-! 그거야! 그 표정! 예전의 너라면, 이 정도로 쉽게 이용하기 힘들었겠지. 자신이 존재함으로써 죽게 되는 생명들을 위해 탈출을 강행한 유명인이니까. 걸작이야.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안타리우스의 성인. 너에게 주어진 운명과 사명에 하루빨리 순응하길 신께 빌어주지. 이다음은, 다시 실험이었던가? 저런, 그때보다 두 배로 힘들어지겠네. 뭐, 힘내라구. 실험은 언젠가 끝나지 않겠어?

 

 

입가에 만족스러움을 담은 웃음을 흘리며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느릿하게 리스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 사람도 자신의 머리를 자주 쓸어내려 주곤 했다. 출근하기 전에, 잠자기 전 인사를 할 때, 소파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을 때, 길가에 핀 꽃을 가까이 보려 고개를 숙였을 때. 그때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던 자신이 퇴색되어가는 듯한, 마치 끔찍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감각에 몸이 절로 떨려왔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입술을 꾹 짓누르는 것뿐이었다.

 

 


결국 다시 이곳에 돌아오게 되었구나. 리스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실험실의 풍경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빨리 인정하는 것이 편할지도 모른다. 신이 있다면,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그래. 이건 신의 뜻일지도 몰라. 마치 꿈을 꾼 듯했다. 아주 짧은 꿈. 수많은 광기 어린 눈들 속에 담겨 색이라고는 짙은 회색의 창살과 어두운 핏빛으로 물든 이곳에 웅크려 있는 자신이 실상이고, 따뜻하고 다정하게 저만을 바라보던 눈동자 속에 담겨 수줍게 미소를 지었던 자신은 허상이었다. 자기 자신을 볼 줄 몰라, 발끝만 바라보던 리스는 릭을 만나 처음으로 자신을 마주했었다. 웃었던 것도 같다. 북받치는 감정을 터트려 울었던 것도 같다. 그 속에 담긴 자신은 꽤 행복했었던 것 같은데. 괴물이 아닌, 여러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리스는 아무래도 다 좋았다. 자신을 비췄던 그 눈을, 웃을 때 다정하게 휘어지던 눈꼬리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수갑이 차여져 있는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가, 또 펴본다. 손 안은 텅 비어있다. 무언가를 이렇게 원했던 적이 있었던가. 이것이 욕심이란 것일까.

 

 

공간이동 능력자.... 였지? 우리랑 아주 깊은 관계인 그 자.

 

 

안돼. 바라면 안 돼. 그냥 잊어버리자. 잊어야 해. 그 사람만큼은.... 절대 이곳에 와선 안 돼. 리스는 다시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웅크렸다. 잊고 싶어서 몸을 계속 웅크렸으나, 그런 자신을 다독여주던 다정한 손길에 매달리고 싶어질 뿐이었다. 그래도 잊어야 했다. 늘 해왔던 대로 하면 돼. 그럼 괜찮을 거야. 아무것도 못 느끼던 그때처럼만....

리스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그녀가 사라진 뒤부터 릭의 모든 시계는 멈춘듯 했다. 손에 쥐고 있는 그녀의 마지막 흔적은 얼마나 쥐었다 놓았는지 이미 글씨가 다 번져, 손때가 더 진하게 묻어있었다. 회사에는 긴 휴가를 낸 지 오래였다. 리스와 단둘이 여행을 가기 위해 아껴둔 휴가였지만.... 릭 톰슨의 일상은 언제 이렇게 그녀로 가득 차버렸을까. 처음 이 집에 리스가 왔을 때, 릭은 그녀가 당장 내일이라도 이곳을 떠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상처 입어 불편한 거동에도 자신의 흔적을 일절 남기지 않겠다는 듯, 그 움직임이 늘 조심스러웠으니까. 릭은 그런 그녀를 딱히 말리지 않았다. 조금은, 편하게 있어도 되오. 하며 좋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이야기를 툭 던졌을 뿐. 그대로 다음 날에 자신에게 일언반구 없이 떠난다고 해도 뭐, 조금은 신경 쓰이겠지만 그녀의 선택이라며 존중했을 것이다. 항상 그렇게 자신만의 나름 선을 그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이렇게.... 릭은 리스한테 유독 잘 어울렸던 붉은 장미가 담겨 있는 꽃병을 바라봤다. 리스. 그거 아시오? 그대를 닮은 이 장미는 시들어도, 말라비틀어져도 그 잔향이 이리도 오래 간다는 것을. 나는 몰랐소.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살짝 건드리자, 꽃잎은 이내 파삭- 하고 바스러져 버린다. 릭은 손에 남은 조각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대로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하고 싶은 말은 입가를 계속 맴돌았지만, 뱉지 않았다. 리스, 그녀를 만나 직접 말할 것이다. 꼭, 말해줘야만 한다. 짧았다면 짧았고, 길었다면 길었던 그 시간은 장미에 꽃을 피우고, 또 그 잔향으로 릭을 집어삼켰다. 리스라는 꽃의 향기에.

 


"오늘은 사거리 뒤쪽 골목의 지하 건물이라더군."

"이번 집회에 그 붉은 머리의 성인께서 다시 나오신다며?"

 

릭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향하는 곳은 리스와 처음 만났던 인적이 드문 골목이었다. 여기저기 정처 없이 골목을 배회하던 발걸음은 이윽고 '설마,' 하는 생각에 잠시 바닥에 붙들렸다. 붉은 머리...? 성인...? 그들은 릭이 엿듣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 했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요 며칠은 왜 안 보이셨던거래?"

"글쎄, 그분도 만능은 아니신가보지. 몸에 상처가 꽤 늘으셨다더군. 로브로 숨기시려는 듯했지만."

 


릭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이겼다. 기어이 두려워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안타리우스.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그 단체. 리스를 계속해서 쫓고 있는 그곳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각오하긴 했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그래도 자신이 곁에 있으면, 지킬 수 있으면 괜찮을 거라며 안일했던 자신은 막연한 미래로 걱정을 미뤘었다. 뭐를 지킨다는 거야, 나는. 리스와 관련된 일만큼은 늦은 후회를 하기 싫었다. 늘 자유롭던 자신을 얽매이게 한, 실패했던 과거를 리스한테만큼은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아둔한 자신의 무력함에 발밑이 꺼지는 듯 했다. 제발. 아직 늦지 않았기를….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낡은 모포를 뒤집어쓴 릭은, 그대로 그들이 말했던 곳으로 게이트를 열었다. 골목은 잠시 빛을 냈다가 사라졌다.

 

 


무언가에 홀린 듯 사람들은 일제히 한곳으로 움직였다. 릭은 이번 잠입만큼은 성공하길 바라며 기척을 최대한 지우고 그 행렬에 합류했다. 다행히 건물 안은 생각보다 어두워, 아무도 릭을 신경 쓰지 않았다. 도착한 널따란 공간에는 사람이 가득 찼음에도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아 적막했다. 그저 단상 위를 쳐다보며 가만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릭은 자신의 심장이 무슨 감정으로부터 이리도 빨리 뛰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주먹을 쥐어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멈추게 하는 것이 다였다.

 


"오오! 나오셨도다!"

"신의 대리인이시여!"

 


단상 위로 모습을 드러낸 로브를 머리 위까지 걸친 몇 명의 사람들. 그중 유독 체구가 작은 여성은 살짝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 나와 단상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의자에 멍하니 걸터앉았다. 릭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경의를 담은 탄식을 내뿜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오직 릭만이 꼿꼿이 서서 단상 위를 바라봤다. 오늘도, 구원의 손길을! 구원의 힘을! 행하여 주소서! 주소서! 고막이 먹먹할 정도의 광기에도 릭은 뚫어져라 한곳만 응시했다.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튀어 나가는 어느 한 남자의 행동에 모두 일제히 비난의 목소리를 내뿜었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의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품 안에는 미약하게 숨을 내쉬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제발...! 신의 힘을...! 구원의 힘을, 이 작고 어린 생명에게 내려주소서...!"

"이, 무슨 불경한! 당장 끌어내라!"

 


의자에 앉아 있던 여성은 그에 손바닥을 들어 보이곤, 주위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찾아온 적막에, 몸을 천천히 일으켜 무릎을 꿇은 남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품 안의 작은 이마를 천천히 쓸었다. 그 자애롭기까지 한 움직임에 다들 숨을 집어삼킨 채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본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여성이 다시 몸을 일으키니, 연약하지만 거칠게 들리던 아이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었다.

 


"되, 된 겁니까? 살 수 있는 겁니까?"

"......"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는 여성에, 남자는 거의 오열하며 감사를 담은 말을 반복했다. 여기저기 고개를 조아리며 나오는 감탄의 소리. 릭만이 손으로 입가에 흐른 피를 닦는 여성을 보며 숨을 집어삼켰다. 그 모습에 확신했다. 자신이 그토록 찾던, 그녀일 것이라고. 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순 없었다. 잘못하면 리스가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릭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살짝 뒤로 빠져 단상 뒤쪽으로 워프했다. 이동하자마자 얇은 벽 너머로 들려오는 대화에 릭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함부로 능력을 쓸 정도로 몸이 아직 버텨줄 만한가 봐?"

"......."

"성인 다 되셨네, 정말. 그 몸으로 오늘 실험, 버틸 수나 있겠어?"

"......."

"난 말이야. 네 그 침묵. 싫지 않아. 어떻게 하면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이제 잘 아니까. 저 아이, 오늘 너 대신 실험에 쓰이기 좋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 안, 쿨,럭...! 안 돼요...!"

"쯧. 기관지랑 내장 쪽이 맛 갔나 보군. 이래서야 당분간 실험은 또 글렀네."

"...쿨럭, 큿...!"

"신도들한테 돌 맞기 싫으면, 입 막아. 피가 다 튀잖아."

"...흐...."

"오늘은 이 정도로 돌아가지. 자애로운 성인의 모습도 보였겠다, 잘 됐네."

 


릭은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에 벽을 짚고 있던 손을 손톱이 나갈 지경으로 긁어내렸다. 그동안 무슨 일이 리스에게 있었을지, 과거에도 어떤 일이 있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대화였다. 가슴이 미어지다 못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자신이 조금 더 빨랐다면, 빨리 알아차렸다면.... 아니. 이제와서 후회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1분 1초라도 빨리 그녀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계속 있다가는 피가 튀다 못해 흩뿌려지겠네. 먼저 들어가. 대충 수습하고 갈 테니."

"......"


점점 다가오는 비틀거리는 발소리에, 릭은 잠시 기다렸다가 지나쳐가는 리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 누구...!"

"쉬잇-! 리스, 나요...!"

 


리스는 눈을 크게 뜨며 입을 틀어막다가, 이내 릭을 밀쳐냈다. 마음속으로 수만 번, 수천 번 그렸던 모습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하니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지만, 입술을 세게 깨물곤 최대한 차가운 목소리를 대신 내뱉었다.

 


"... 돌아가세요."

"... 리스?"

"어서요.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에요."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오? 그대를, 그대를 두고 나혼자 어떻게 가란 말이오...!"

"... 저는 이곳에 있는 게 맞아요. 쿨, 럭.... 이곳에 있는 게, 그...쪽하고 있는 것보다 더 의미 있어요."

"...무슨,"

"저는, 이곳에서는 저로 있을 수 있어요. 그냥 아무 생각하지 않고, 해야할 것을 하면 되니까."

"......"

"그동안 미안했어요. 이만 절 잊어주세요."

 


리스는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마저 떼었다. 그대로 굳은 듯 멈춘 릭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의견을 한 번도 피력한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기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엉키는 듯했다. 존중과 기다림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그녀의 속마음에 한 번도 귀 기울이지 못 했다는 생각이 릭을 크게 뒤흔들었다. 이내 크게 기침을 하며 비틀거리는 리스의 뒷모습에 나간 정신이 돌아온 듯 바로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리스는 아까보다 더 강하게 릭을 뿌리쳤다. 다른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리스는 흠칫 놀라 눈에 두려움을 순간 스치듯 담으며 뒤를 돌아본다. 제발, 그냥 가주세요. 릭은 애절한 그 목소리를 듣고 잠시 가만히 서서 시선을 떨구다, 다시 리스를 끌어당겨 이번에는 품에 안고 작게 무어라 속삭였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리시오."

 


리스는 그 말에 참고 참았던 울음이 터져버릴 것 같아, 차마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릭이 그렇게 빛 속으로 사라지자, 뒤늦게 잠시나마 닿아있던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느끼려는 듯 스스로 몸을 감싸 안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벌써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 느껴지는 것은 냉랭한 한기뿐이었다.

 


"허어?"

 


로브를 쓴 자는 얼마 안 가 서 있는 리스에게 왜 아직도 안 가고 있느냐고 추궁하려는 찰나, 그녀 옆에 찍힌 발자국에 허- 하는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뭐, 조급해할 필요 없다. 어차피 곧 만나게 되겠지. 절망스러운 표정들을 볼 생각에,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   ◈   ◈


 

 

실험을 진행하기엔 입은 상처가 너무 많아, 회복이 느린 상태였음에도 아까의 말은 쉽게 번복됐다. 오늘 실험은 그대로 강행한다,는 그 한 마디에. 리스는 서 있을 힘조차 없었으나 오히려 평소보다 더 거침없이 몰아붙여지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그래, 이게 나았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계속 후회할 것 같았다. 그토록 바라던 그 눈빛을, 그 손을, 그 품을, 제 손으로 직접 쳐냈던 것을.... 이건 그 죗값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편했다. 더, 더 아파야 한다. 그 사람이 상처 입은 것보다 더. 하지만 한계치까지 다다른 몸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쯧. 기어이. 혀를 차는 소리에 이어 몸이 짐짝처럼 들리고, 익숙한 창살 안쪽에 던지듯 내려졌다.

 


"내일까지 제대로 회복 시켜."

 


말이 쉽지 지금의 몸상태라면 몇 달동안은 절대 능력을 쓰지 않아야 회복이 가능할 터였다. 리스는 대답할 힘도 없어 그냥 가만히 누워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기다렸단 듯 깊은 어둠과 적막이 리스를 내리눌렀다. 그에 아까의 장면이 계속 똑같이 되풀이되듯 리스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얼굴이 그새 많이 상해 보였다. 밥을 잘 안 챙겨 먹은 걸까.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까. 기다려달라니. 지금의 자신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됐었다. 기대하면 안 되는데. 자신은 그러면 안 되는데. 희망이라는 이름의 끈이 눈앞에 놓인 기분이었다. 잡아선 안 된다. 자신이 그걸 잡는 순간, 그 끈은 릭, 당신의 발목을 잡아 온몸을 옭아맬 것이며, 마지막엔 결국 목을 조르게 될 것이다. 그냥 저를 잊으며 행복하게 살길 바랐는데. 아니, 사실은 기억해 주기 바랐다. 나를, 당신의 눈에 잠시 담겼던 나를.... 한 번이라도 좋으니, 어쩌다 한 번은.... 감히 내가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 걸까. 아.... 한 번.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몸을 들썩일 기운도 없어, 그저 눈에서 자연스럽게 가만히 흘릴 뿐이었다. 그러게, 왜 저를 만나러 왔나요. 아니, 만나러 와줘서 너무, 아니....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침에도, 그냥 휩쓸리게 두었다. 눈물과 함께 꾹 눌러왔던 욕심도 계속, 계속 흘러나왔다. 자신이 이렇게 뭔가를 바란 적이 있었나. 아니, 바라선 안 된다. 그 사람만큼은, 절대로....

 

그렇게 멍하니 누워 있으니,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가 떠오르고 만다. 그때도 딱 이 정도의 상처였던 것 같다. 용케 쫓아오는 이들을 따돌려, 빛이 하나도 들지 않던 구석진 골목에 쓰러져 있었지. 그래, 지금의 자신처럼. 그냥 눈을 감고 이대로 끝나길.... 하고 바랐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으로 하늘을 눈에 담으려고 했을 때,

 

"...스."

 


그때 처음으로, 녹음을 담은 눈빛이 저를 마주해 왔었다. 마치 지금처, 럼.... 어,

 


"...리스."

 


아. 이제, 헛게 보이나 보다. 창살 밖으로 당신이 서 있는, 그토록 보고 싶던 그 얼굴이 보이는 걸 보니. 마지막으로 그를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단 기도가, 신께 닿았나 보다. 제가 감히 신의 대리인이라며 당신의 이름을 매일매일 더럽혔음에도, 신은, 당신께서는 정말 자애로우신 분이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 릭의 눈에 처음으로 담겼을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허상임을 앎에도 아까 미처 부르지 못한 당신의 이름을 입에 담아본다.

 


"...릭? ...릭. 흐으, 릭...."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담고 싶어서 눈을 감았다 뜨니, 허상은 사라져있었다. 역시나.... 아니. 그래도. 허상이었을지라도 자신의 마지막 소원은 이루었다.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더 보고 싶었으니까. 정말, 정말 보고 싶었으니까. 이제 울음은 입으로도 토해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눈을 피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그 모습을 담아둘껄. 그 이름을 한 번이라도 더 불러볼껄. 자신의 감정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는데.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었다. 그런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원망스러웠다. 릭, 릭.... 미안했어요, 정말로....

 


"이제, 사과는 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

"그대의 사과, 이미 글로도 말로도 충분히 들었소."

"... 릭...?"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소. 더는 그대를 사과하게 하지 않겠다고. 나한테, 한 번의 기회를 더 준다면 말이오."

"... 아."

 


꿈...? 환상...? 리스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귀 뒤로 넘겨주는 평소와 같은 손길에, 설마.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릭의 외투에 감싸여 자신의 몸이 들려 올라감에, 그럴 리가. 이내 마주해오는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리스는 다시 눈물로 앞이 뿌예졌다. 혹시나, 혹시나 또 눈을 감으면 사라질까 겁이 나, 감을 수 없었다. 그에 릭은 꿈이 아니라는 듯 볼을 마주 부벼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흐, 으...!"

 


리스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릭의 옷깃을 그러잡았다. 차마 만질 수 없었다. 정말, 이 모든 게 꿈이고 허상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쉬이 떨쳐내기 힘들었다. 그래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이 1초라도 더 흐를 수 있다면, 당신의 눈에 내가 1초라도 더 담길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리스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감동적이네요."

 


창살 너머에 들리는 박수 소리에 리스의 눈은 공포로 점칠 되었다. 옷깃은 잡은 손은 오히려 떨림을 멈췄다. 차마 소리의 근원을 볼 수 없어, 그대로 굳은 듯했다. 릭은 그런 리스를 자신의 품에 더 기댈 수 있게 고쳐 안으며 창살 너머를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릭 톰슨 씨. 언제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아, 물론 미천한 제가 아니라 여기 높으신 분들께서."

"...우리가 인사를 할 사이는 아닐 텐데."

"예의죠. 상호 간의. 뭐, 차릴 생각 같은 건 없으신 모양이네요. 지금 하시려는 행동을 보니."

"......."

"리스'님'의 의사는, 물으신 겁니까?"

"......."

"그럴 리가, 없으실, 텐데요? 리스님. 잊으신 겁니까? 저희와 처음 하셨던 약속을."

"...흐...."

"직접 대답하세요. 지금 이 행동, 책임 지실 수 있습니까?"

"왜 그녀에게 추궁하지? 멋대로 굴고 있는 건 나인데."

"아.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넘어가기엔, 뒷감당이 힘드실 텐데요."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오?"

"마지막 기회를 드린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기회를 드렸으니까요."

 


리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대로, 이렇게 릭과 함께 사라진다고 해도 분명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다시 자신을 찾아낼 것이다. 그럴 능력이 충분히 되는 집단이었으니까. 자신만 쫓기는 것이 아닐 테지. 아마, 릭도 지금까지의 생활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은 여러모로 그에겐 독, 위험 그 자체였다. 리스가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자,

 


"기회? 그건 그쪽에서 줘야 할 것이 아니오. 리스가 나에게 주어야 하는 것이지."

"...뭐라구요?"

"나도 그쪽도, 리스한테 기회를 준 적이 없다는 말이오. 그쪽도, 리스의 의견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니오?"

"리스님은, 스스로 선택하셔서 저희 쪽으로 오신 겁니다."

"아니, 틀렸소. 오지 않으면 안 되게 종용했겠지."

"......."

"그것이 기회를 준 것이오? 내가 생각하기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 하여도, 스스로 오신 건 맞습니다. 게다가 이미 오늘 한 번, 당신을 위한 선택도 했던 것 같은데요?"

"그래. 그건 당신 말이 맞소. 그 말은 결국 그 어느 것도 리스 자신을 위한 선택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것이 되지. 그러니 두 쪽 다 기회를 주니 마니 할 자격 같은 건 없소."

 


릭은 창살 너머의 싸늘한 시선을 거두고, 빛나는 녹색을 다정하게 품은 눈동자로 리스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살짝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 선택권을 주겠소. 이건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선택이오. 다른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마시오. 지금 당장 느끼는 감정에 집중하여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걸 같이할 기회를. 그대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갈 기회를 나에게 주시오."

 

 


릭은, 지금 당장이라도 리스와 함께 도망갈 수 있었다. 사실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눈앞의 저 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이대로 도망갈 것임에 뻔했고, 그들이 앞으로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은 더 깊게 파인 구멍으로, 끝 없는 나락 속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겠지. 다시는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는 같이 있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릭은, 듣고 싶었다. 한 번도 듣지 못 했던 그녀의 마음을, 그녀의 선택을.

 

 

갑자기 손에 쥐어진 여러 갈래의 끈이 마치 리스, 저를 묶고 있는 듯했다. 가장 좋은 선택. 그것에 자신은 늘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이 맞는 선택이라고 생각했기에. 안타리우스. 이 자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을 쫓아올 것이다. 쉽사리 놓아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리스는, 아까 잠시 보였던 끈을 발견하고 만다. 잡아달라는 듯이 눈앞에 유영했던 '희망'이라는 끈을. 더 이상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끈의 끝이 자신의 머리색처럼 붉은 피의 색깔이라고 해도 더 이상 자신을 담고 있는 초록색 빛을 져버리고 싶지 않았다. 마치, 신호등의 불빛처럼 가도 괜찮다고 등을 떠밀어주는 듯했다. 리스는, 그 끈을 마지막으로 잡아보기로 했다. 이것이 자신의 목을 조여 묶어버리는 끈이라고 해도, 릭과 함께라면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가요, 릭."

 


리스는 나지막이,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우리들의 집으로."

 


리스의 말이 끝마치자마자 열린 게이트의 빛은, 어두운 지하실 전부를 다 비추듯 밝게 빛났다. 릭은 천천히, 그 게이트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선택, 후회하실 겁니다."

"그건 가봐야 아는 거겠지. 윗분들껜, 대신 안부 전해주시오."

"어차피 조만간 직접 하게 되실겁니다."

"그럼 그때 가서 하면 되겠군. 뭐, 그럴 일은 없을테지만."

 


릭은 살풋 웃으며 리스를 편하게 다시 고쳐 안은 뒤, 유유히 걸어나갔다. 지하실은 다시 적막했고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그럼에도 게이트 안, 리스의 손은 밝게 빛났다. 손아귀에 잡은 희망의 빛으로 인하여.

@Mini_jubd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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