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봄
지하연합 소속 전술가이자 회복 능력자, 플리아나스(Pleanas)가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건 지난 밤, 그믐달이 어슴푸레 뜨던 날 밤의 일이었다. 사실 정확한 시간을 아는 이는 없었다. 누구도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연합 사무실의 구석에 붙어 있는 그녀의 방에는 바깥문이 따로 나 있었고, 연합 사무실과 이어진 작은 문에는 창문 같은 것이 나 있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하루 이틀쯤 고요해도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는 편이 아니었다. 최근 안타리우스와 연합의 정면충돌이 불가피한 일이 되면서 그녀의 업무는 더 많아졌고, 연합의 이들은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니고서는 플리아나스의 연구실을 찾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문 너머가 너무 조용한 것이 신경 쓰였던 루이스는 동틀 무렵 연합에 돌아오자마자 플리아나스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몇 번의 노크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루이스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일전에도 사흘 정도 내버려 두었다가 그 안에 쓰러져 있던 것을 발견하고 연합이 발칵 뒤집혔던 적이 있었다. 그 순간을 떠올린 영웅은 잠시 망설이다가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파르스름하게 질린 차가운 손이 쇠로 된 동그란 손잡이를 쥐고, 오른쪽으로 가볍게 돌렸다. 낡은 문은 생각보다 부드럽게 열렸다.
그리고 그를 반긴 건 텅 빈 플리아나스의 방이었다.
“이렇게 정리를 잘할 줄은 몰랐데이.”
“내 말이 그 말이야. 완전 새 방 같네.”
“이 방을 연구실로 쓰라고 짐 치워줬을 때의 풍경이랑 비슷한 것 같지 않아?”
“그러게요. 그런 것 같네요. 그때 대청소하느라 고생깨나 했잖아요.”
플리아나스는 다정하고 야무진 여인이었으나 말끔하고 정리정돈이 철저한 사람은 못 되었다. 일거리를 쌓아두고 지내기 일쑤라 그녀의 책상 위는 늘 온갖 서류와 음료를 담아 마시는 컵 따위로 어지러웠고, 서랍이나 책장의 상태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떠난 지금만큼은 달랐다. 그 내용물들을 대체 다 어디로 가져다 두었는지 책상도, 책장도, 하다못해 선반이나 서랍, 침대 근처마저도 말끔해서 휑해 보일 정도였다.
트리비아 카리나는 볕이 드는 작은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했다. 꼭 ‘떠난’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 같다고. 기별 없이 찾아왔던 첫 만남처럼 갑작스럽고 허망한 이별 같다고.
그녀의 생각이 전해졌는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던 레베카 러쉬톤이 말했다.
“이러니까 녀석 처음 왔을 때 생각나네.”
“시체 치우는 줄 알았지. 꼴이 너무 엉망이라서.”
“어쩌다 다친 건지는 결국 기억 못 했제?”
“어. 아무리 해도 모른다드라.”
“충격이 컸던 걸까요….”
“살아남은 게 어디야. 루이스가 아니었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몰라.”
중얼거리던 연합 사람들의 시선이 책상에 앉아 있는 푸른 머리칼의 영웅에게 일제히 날아든다. 그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유일한 물건을 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하얗고 멀끔한 얼굴에는 상심한 기색이 만연했다. 플리아나스가 떠나며 유일하게 남긴 물건인 유리병은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고 길이가 길었는데,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겨 찰랑이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게 그녀의 눈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별명인 ‘불사조’에 걸맞게, 플리아나스의 신체에는 상처를 치유하는 힘, 즉 일종의 재생력이 담겨 있었다.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온 뒤에도 그 치유 능력은 건재했으니, 이 한 병으로 숱한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남은 흔적이라고는 이게 다라는 사실이 마음이 아팠다. 루이스는 더욱 착잡해졌다. 제 물건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이렇게 애를 썼으면서도, 연합 사람들이 아프거나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진심만큼은 내다 버릴 수가 없어 고스란히 두고 간 것만 같아서. 그게 그녀가 차마 떨쳐내지 못했던, 그녀의 가장 짙은 소망인 것 같아서.
플리아나스가 그러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루이스는 그 이후로 계속 플리아나스의 행방을 쫓았다. 결전을 목전에 두고 바쁜 와중에도 잠을 쪼개 가면서 그녀를 찾아다녔는데, 어찌나 간절한지 연합 사람들은 차마 그에게 그럴 시간이 없으니 다가오는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불사조가 날아갔어.” 그 말에 그녀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던 능력자들이 한 번씩 지하연합의 사무실을 찾았다. 잭 더 리퍼의 부탁을 받은 클리브 스테플이 잠시 들러 사이코메트리 능력으로 책상 주변의 물건을 하나씩 만지기도 했다. 읽어 들인 정보로는 그녀의 목적지를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었다. 다만 그곳이 무척 먼 곳이며,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짐을 정리하는 내내 그녀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차라리 알지 않았더라면 아프지나 않았을 것을. 플리아나스의 빈 연구실에 선 사람들은 먹먹한 침묵 속에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잭 더 리퍼, 클리브 스테플, 다이무스 홀든, 사밀레이나 데인 드 오귀스트와 플라네타리스까지 찾아갔건만 루이스는 별다른 성과 없이 망연하기만 하였다. 웬만한 이들은 플리아나스를 찾는 데 협조적이었는데, 유일하게 협조적이지 않은 이가 단 한 명 있었으니, 그는 그녀의 검술 스승이었던 벨져 홀든이었다. 그는 ‘모른다’가 아닌 ‘말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너는 알고 있잖아.”
트리비아에게 부탁했던 물건을 가지러 온 벨져가 루이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다. 발끈한 영웅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플리는 항상 너를 믿고 따랐어. 네게 말도 하지 않고 사라졌을 리가 없어.”
“나는 너와 한가한 이야기나 하려고 온 게 아니다. 품격 떨어지는 언쟁을 언제까지 이어갈 참이지. 안타리우스와의 결전으로 바쁜 것이 아니었나?”
“왜 말하지 않아? 플리에게 부탁이라도 받은 거야?”
“그렇다면?”
“…….”
“그렇다면 어떻게 할 테지, 루이스. 내가 그녀와의 약속보다 너와의 의리를 우선시할 거라 믿었나?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청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
그들의 유대감은 얇았다. 살얼음처럼 쉽게 깨졌다. 그걸 이어붙이고 있었던 건 플리아나스의 공이었다. 그녀가 사라진 지금, 벨져 홀든에게 루이스의 상황을 봐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루이스의 예상은 옳았다. 벨져는 제자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 정말로 떠나도 좋을지, 떠나기 직전까지도 찾아와 그에게 자문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제 행방과 목적지를 지하연합에 비밀로 해 달라 부탁했다. 물론 부탁하지 않았더라도 벨져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유야 단순했다. 그녀가 그러기를 바랐기 때문에.
“플리아나스를 존중하고 싶다면 그녀를 찾지 말도록.”
“위험한 짓을 할 것이 뻔한데 어떻게 그래?”
“목숨보다 고귀한 긍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녀는 어린애가 아니야, 루이스. 불사조를 새장에 가둬두지 말아.”
“벨져. 너와는 정말 안 맞아.”
“맞출 필요 없지. 이제는.”
루이스와 벨져 사이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트리비아는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탁자 위에 재단에서 가져온 수하물을 툭 내려놓고는 제 일을 하러 가 버렸다. 두 사람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었으니, 그녀가 끼어든다고 해서 말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여태 저토록 싸우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른들은 저마다 대화를 애써 외면하며 할 일을 분주히 찾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아저씨. 플리아나스 누나 어디로 간지 알아?”
“그럼 엘리도 알려줘!”
“왜 혼자 알고 있어?”
“…….”
루이스는 부러 아이들을 말리지 않았다. 양옆으로 어린아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리자 벨져는 미간을 좁혔다. 전쟁을 앞둔 집단에 어린애들이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저를 귀찮게 하기까지 한다. 매몰차게 떼어낼 수도 없으니 더 짜증스러웠다. 밀치기라도 하면 울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러게.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사실 저희도 좀 궁금하거든요.”
“뭐, 누가 찾아 간다냐. 물론 영웅 나리는 진짜 찾아가겠지만. 우리가 다 움직일 수는 없거든. 그래도 한 식구였는데 행방을 모르니까 찜찜하다고.”
“그렇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모르겠데이. 좀 지나니 보고 싶구마.”
“…한 마디만 더해, 아주.”
벨져가 어른들의 말을 무시하며 일단 엘리노어부터 번쩍 안아 멀리 떼어내려던 찰나였다.
덜컹. 문이 열렸다. 사무실의 녹슨 문이 삐걱거렸다. 툭하면 고장이 나는 철문이 잘 열리지 않고 삐걱거리는 비명만 내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랫부분에 찌그러지고 긁힌 자국이 있는 문으로 향했다. 끼익, 높은 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자 토마스가 말했다.
“…또 시작이네요. 언제 고쳐야 하는데. 바로 안 열리는 모양인데, 제가 열어드릴게요. 안에서 같이 밀면 그래도 좀 낫겠죠.”
그러나 토마스가 굳이 나서서 애쓸 필요는 없었다. 짧은 침묵 후에 쾅, 아예 문을 발로 차서 때려 부수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녹슨 경첩이 힘없이 덜렁거리는 문이 앞으로 쓰러지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잿빛 먼지가 나풀나풀 날렸다.
인사도 없이 문부터 발로 차서 연 남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종전까지 함께 행동합시다. 안타리우스를 부수는 걸 도와주겠다, 이 말입니다.”
“뭐?”
“지금부터요?”
“갑자기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람.”
“왜?”
“뭘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루드비히 와일드가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으며 덧붙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니 손을 잡자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필요한 게 뭔데?”
벨져와의 언쟁으로 잔뜩 날이 서 있던 루이스가 뾰족하게 물었다.
“너는 헌터고, 원하는 게 있다면 누구의 손이든 망설이지 않고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 그런 식으로 안타리우스와도 협력한 적이 있었겠지. 그런 너를 어떻게 믿겠어? 네가 플리의 연인일 때는 그 사실을 믿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 애의 행방을 알려준다면 모를까.”
“그거면 됩니까?”
“뭐야. 플리의 행방을 알아?”
“정말? 어디에 있는데?”
“루드비히.”
“아, 당신도 있었습니까. 벨져 홀든. 보아하니 아직도 말을 않은 모양인데요.”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
“내 말이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는 내가 정합니다. 당신이 말하지 않을 거라면 내가 말하겠습니다.”
“…….”
안 된다고 해도 들어먹을 인간도 아니다. 벨져가 루드비히를 잠시간 노려보았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선심을 쓰고 있다는 듯 그를 지켜보며 짧은 침묵을 이어갈 뿐이었다.
결국 수세에 몰린 벨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리우스로 갔다. 클론 복제 실험에 조력하기로 했어. 연구소 위치는 사밀레이나가 알려줬다. 그 이상의 정보는 우리에게도 없어.”
“뭐?”
“뭐라고?”
“미쳤어?”
“아니, 잠깐만. 사밀레이나가 알려줬다고? 분명히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잖아!”
“이젠 커플이 쌍으로 사기를 치냐!”
“제 말을 다 믿으시면 곤란합니다. 저는 정보원이고, 정보를 취사선택에서 전달하는 것이 제 업무나 마찬가지죠. 게다가 저는 헬리오스 소속인데, 대체 무슨 근거로 지하연합에 솔직할 거라고 믿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열린 문 너머로 사뿐사뿐 들어온 사밀레이나가 벨져 홀든의 옆에 반듯하게 섰다. 이곳까지 날아왔는지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바람을 불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던 그녀의 주홍색 눈동자가 천천히 회녹색으로 가라앉았다.
“…존재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라며 클론 실험을 반대하지 않았어? 그런데 갑자기 왜….”
“필요한 게 있어서? 하지만 혈혈단신으로 들어갈 만한 곳이 아니야. 적어도 도움 정도는 구했어야지. 전투 능력조차 없잖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루드비히 와일드. 우리와 함께 움직인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저는 그녀를 믿지만, 그와는 별개로 플리아나스가 그곳에서 혼자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 않거든요. 모종의 방법으로 연락을 이어가기로 했습니다만, 연락이 끊긴 지 만 이틀이 되었습니다. 이제 찾으러 갈 때가 된 듯하군요. 본거지를 치는 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우리는 목적이 비슷하니, 잠시 손을 잡는 것뿐이지요.”
“…그렇다면 안타리우스 소속 연구소를 공격하는 일정을 당겨야 해. 빠듯하겠는데…. 부상자가 조금 있어서, 능력자가 서너 명은 더 필요해.”
“참전하마.”
“벨져 경이 간다면 저도요.”
“플라네타리스를 부르는 건 어때요, 선배? 플리아나스의 일이라면 분명히 도와줄 거예요.”
“말은 안 꺼내 봤지만 그럴 거라는 확신은 드네….”
“그럼 이럴 게 아니라 서둘러야겠어. 트리비아.”
“응.”
“당장 전술을 짜자.”
새벽이 깊었다. 시간은 야속할 만큼 부지런히도 흘렀다. 새벽이 다 저물 시간이 되자 사무실에 모인 이들의 절반이 뻗어 버렸다. 토마스는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방에서 애들을 달래 재우다가 함께 곯아떨어져 버렸고, 도일과 휴톤은 창고의 한구석을 차지했다. 레베카는 의자에 기댄 채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는데, 이따금 목이 아픈지 앓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마지막까지 깨어 있는―사실 ‘살아남은’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다.―트리비아와 루이스, 벨져, 사밀레이나, 플라네타리스, 그리고 루드비히는 탁자에 어지러이 널린 종이를 뒤적거리며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건 너무 위험하다니까, 루이스. 차라리 이 골목으로 가. 토마스의 능력이라면 그쪽에서 강화 인간들을 보낸다고 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
“그건 토마스에게 부담이 가잖아. 오히려 뒤를 치는 무리가 있다면? 역으로 우리가 당할 수도 있어.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야. 우리는 금방 빠져나갈 수 있지만, 플라네타리스와 레베카, 도일, 그리고 특히 나이오비는 그대로 갇히고 말 거라고. 심지어 나이오비의 능력은 좁은 길목에서는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야.”
“…대체 왜 싸우고 있는 거지? 그냥 제일 빠른 길로 가. 다 죽이고 가면 되잖아. 이리스도 데려가?”
“무모한 짓은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플리아나스가 인질이 될 수도 있어.”
“역시 미리 다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짜증 나네.”
“아, 모르겠다. 뭐가 제일 효율적인지 모르겠어. 플리는 대체 평소에 이런 걸 어떻게 한 거야…. 이러다 머리카락 빠지겠어.”
“몰랐어? 그래서 내가 플리 가발 사줬잖아.”
“뭐? 진짜?”
“루이스…너 지금 저걸 믿은 거야?”
“무슨 그런 농담을 하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 플라네타리스에게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보낸 루이스가 책상에 길게 엎드렸다. 눈이 시큰시큰하고 허리가 뻐근했다. 낡은 창문 너머로는 파르스름하게 새벽이 빛나고 있었는데, 동쪽으로 손톱 조각 같은 그믐달이 떠 있었다.
“그냥 뽑기로 하자. 어차피 목숨 거는 건 다 똑같은데. 사실 다 비슷하잖아. 누가 죽고, 누가 앞에 서고, 누가 더 위험한지의 차이지….”
“찬성.”
“나도 찬성.”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일하는군, 연합은.”
“그러는 너도 결국 못 고르잖아, 벨져.”
“아, 됐어. 딱 한 시간만 쉬자. 이러다 진짜 머리에서 김 나겠어.”
책상에 둥글게 모여앉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대하게 한숨을 쉬었다. 각자 피로에 거뭇거뭇하게 가라앉은 눈 밑을 문지르고 욱신거리는 옆머리를 매만지는 내내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보지 그래….”
“그럼 당신이 하세요.”
“그래. 네가 해.”
“아니…진짜….”
“그럼 우리 돌아가면서 하나씩 이야기해요.”
“뭘?”
사밀레이나의 제안에 벨져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의 연인을 돌아보았다.
“플리아나스와 있었던 일을요.”
“음….”
“좋아. 하나씩 얘기해 보자. 누구부터 할래?”
주제가 정해지자 사람들은 의외로 의욕 있게 나섰다.
역시 제일 먼저 나선 것은 루이스였다. 그는 그녀의 ‘시작’이 자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고 믿었다. 그건 옳은 주장이기도 했다. 플리아나스는 그의 구명으로 인해 새 삶을 얻었고, 지하연합에 소속되었으니까. 그녀가 그 자리를 얼마나 달가워했는지 모르는 이는, 적어도 연합에서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의문스러운 게 많은 첫 만남이었어. 이름도, 나이도, 살던 곳도, 아무것도 몰랐어. 소속이 어딘지도 몰랐는데 나는 플리를 넙죽 구했지. 어떤 의심도, 망설임도 없었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맞아. 마치 그래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어. 꺼져 가는 금색 눈동자를 보았을 때, 체념한 시선을 마주했을 때…그때는 정말 영구동토 안에 선 것처럼 추웠어. 신기하지? 여름이었거든, 그때, 런던이.”
“잠깐만요. 플리아나스의 눈동자는…녹색입니다만.”
“응?”
“…그러게. 녹색이잖아? 빛을 받으면 미세하게 금색으로 반짝이기는 하지만…확실히 금색은 아니었어.”
“이상하다. 금색이었는데….”
“기억은 불완전할 수도 있지. 게다가 그때 넌 정신이 없었을 테니까. 마저 이야기하도록.”
“뭐가? 이게 다인데?”
“…….”
“당신을 사랑하지만…정말 말재주 없다.”
“미안해….”
“그럼 다음은 제가 할게요.”
그들의 대화를 잠잠히 듣고 있던 사밀레이나가 끼어들었다.
“사실 저는, 루이스가 플리아나스를 구하기 전에 그녀를 만난 적이 있어요.”
“뭐야?”
“왜? 어떻게?”
“둘이 원래 아는 사이?”
“추억을 털자고 했지 파격 발언을 하자고는 안 했는데….”
“조용히 하고 들어. 지금 아니면 못 들으니까.”
어느새 깨어난 레베카와 토마스가 슬금슬금 다가와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사밀레이나는 그들을 한 번씩 바라보았으나, 말리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비밀로 놔둘 필요가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비밀조차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애매했던 사실이었을 뿐이다. 본인은 아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으나 플리아나스는 사밀레이나를 볼 때마다 거북한 얼굴로 슬금슬금 피했다. 본능적으로 위화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플리아나스를 달랠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지하연합의 분위기는 그녀와 도무지 상성이 맞지도 않았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웬 나무뿌리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있었어요.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덩굴의 끝은 잘려져 있었어요. 단면이 들쭉날쭉했으니 ‘잘렸다’기보다는 ‘찢겼다’라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때는 플리아나스에게 의식이 있었어요. 사실 그 모습을…의식이 있다고 표현해도 될지는 모르겠네요. 사람보다는 괴물에 가까운 모양새였거든요. 저는 안타리우스가 만든 실패작인 줄 알았어요. 죽일까 고민했어요. 머리가 산발이었고, 무언가 비명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기억하는 단어는 세 개였어요. ‘복원’, ‘베로스’, ‘열세 번째’.”
“그래서?”
“그런데 제 능력을 쓰자 목에 얼기설기 엮인 선이 드러났어요. 사방으로 모두 뻗어져 있었고, 바닥을 뚫고 들어간 것도 있었어요. 끝도 모르고 이어져 있었으니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는 몰라요. 제가 보았던 실 중 가장 불길한 종류였어요.”
“…왠지 당사자의 허락도 없이 과거를 막 들추고 있는 기분인데.”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사밀레이나는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잘랐어요.”
“그냥?”
“네. 자르려고 하면 자를 수 있거든요. 잘 안 잘리긴 했지만.”
“다?”
“전부요.”
“한 가닥도 남김없이?”
“무엇인지 알고 남기겠어요.”
“뭔지도 모르고 자른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자를 거면 다 잘라야죠. 머리가 엉켜 있어서 단발로 자른 것도 사실 저예요. 그건 능력이 아니라 일반 칼을 썼어요.”
“플리아나스가 너를 불편해하더군.”
“아마 그 기억이 은연중에 남아서일지도 모르겠어요. 저라도 마냥 편할 수는 없을걸요.”
“확실히….”
“그래서…기억을 잃었나? 만약에 그 선이 플리의 기억이나, 운명이나, 뭐 그런 것들이었다면….”
사밀레이나는 루이스의 추측에 어깨를 으쓱했다. 죄책감은 없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실재하지 않는 것과 실재하는 것을 넘나들며 조정하는 그녀만이 느끼는 직감이 있었고, 그 직감이 그녀에게 그것을 잘라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걸 한 가닥이라도 남겼다면, 지금의 플리아나스는 없었을 것이다.
“기억하지 않는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어. 플리아나스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아 했잖아.”
“음. 그랬었지.”
“좋아. 새로운 사실을 들었네. 플리에게는 비밀로 하자. 알아서 별로 좋을 것도 없잖아. 그럼 다음은 누가 할래? 벨져, 넌 말할 거 없어?”
“있다. 다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군.”
“안 말할 거면 운도 띄우지 말았어야지. 빨리 말해. 우리 다 말하고 있잖아.”
“플리아나스가 단도를 배우고 싶어 했던 이유를 알고 있나? 그것도, 정확히 나를 콕 집어서.”
“아. 저 그거 궁금했어요. 왜 하필이면 단도고, 또 왜 하필이면 스승이 벨져 경인지도요.”
“사실 나도.”
“전투 상황에서는 비능력자와 크게 다를 게 없으니까, 짐이 되는 게 싫다면서 플리아나스가 속상해하길래 연합 쪽에서도 무기를 이것저것 권하기는 했거든. 주로 추천한 게 활이었어.”
“사실 나도 활을 추천했었다. 연합에는 근거리에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자가 적지 않으니까.”
“그렇제.”
어느새 일어난 도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굳이 고집을 부렸어. 꼭 단도여야만 한다고.”
“왜? 실전에 별로 쓸 일이 없을 텐데?”
“활은….”
사밀레이나가 작게 입을 벌렸다. 정답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그녀의 속삭임이 벨져의 말을 앞질렀다.
“활은 자결할 수 없으니까.”
“…….”
“가장 중요한 순간…짐이 된다면….”
“…….”
루이스가 비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빨리 죽어서 짐이 되지…않으려고.”
“그래.”
“절대 안 알려줄 거야. 그런 방법 같은 건.”
“그러니까 나를 찾아왔다. 목숨보다 중요한 긍지가 있다고 믿으니까, 내가.”
“왜….”
“…….”
“…….”
아무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독한 침묵이 흘렀고, 루이스는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어찌나 강하게 마주 잡았는지 손목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였다.
지켜줄 수 있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의남매의 약속을 나누었을 때, 목숨도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그런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를 믿지 않아서, 연합을 의지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과 별개로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반드시 혼자 있으려 했다. 무엇이든 홀로 해결하려 했다. 설령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려 한다고 하더라도.
‘짐’이라니. 그렇게 생각한 적은 결단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소용은 없었겠지. 플리아나스가 정말 그걸 몰랐을까?
“축제에 간 적이 있었어.”
플라네타리스가 말했다. 보석을 닮은 보랏빛 눈동자가 떠오르는 아침의 빛을 머금고 푸르게 일렁였다. 그녀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직접 만든 라벤더 화관을 플리아나스의 머리에 씌워 주었어.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고, 시장에서 산 귀걸이를 걸었어. 싸구려 귀걸이였는데 잘 어울렸어. 마치 그 애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물건 같았지. 발목까지 내려오는 원피스는 요정 날개처럼 팔락거렸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노랫소리에 맞추어 그것을 따라 부를 때마다 그 애가 웃었어. 환하게 웃고, 더 활짝 웃고, 크게 웃다가,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어.”
“예뻤겠네요.”
“‘필리스, 이리 와. 그 망토 정말 예쁘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검은색이 잘 어울려? 너는 별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별 그 자체인 것 같아.’ 그 말이 노랫말처럼 들렸지. 그런데 이상했어. 그때 여신이 내게 속삭이고 있었어. 그 애를 떨어뜨리려면 지금이라고 말하고 있었어. 나는 여신의 말을 듣지 않았지. 난 여신의 축복 아래 살고 있고, 그녀의 말을 옮기는 사자이기도 하지만…그렇다고 그녀의 말에 복종하며 살지는 않았거든. 이상했어. 그 순간이 정말 행복했는데, 이래도 좋은 건가 의심할 만큼 기쁘고 벅찼는데…단절된 느낌이 들었어. 이 순간이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괴리감. 이 추억이, 그저 추억으로 끝날 것 같다는…. 어쩌면 나는 오늘의 비극을 예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비극이라고 쉽게 단정하지 말아. 말이 씨가 되는 법이다.”
그런 식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들만큼 길지는 않았으나 지하연합의 능력자들도 한두 마디씩 보탰다. 시간이 빠르다고만 생각했는데, 되돌아보니 쌓아온 추억들이 적지 않았다.
한 바퀴를 돌아 모두가 웬만큼 입을 연 뒤에 그들은 다시 전술을 짰다. 여유가 생긴 뒤인지 아까만큼 날 선 반응이 오가지는 않았다. 고심해서 고른 두 가지의 계획 중 장점을 추려서 적당히 섞고 나자 그들은 완전히 긴장이 풀려 늘어졌다. 해가 뜨다 못해 대지의 열기가 식어가고 있었고, 탁자 위에는 에너지바 껍질이나 초콜릿 포장지 같은 것이 너저분하게 흩어진 채였다.
식사라도 좀 하겠다며 자리를 떠나고 나자 사무실이 썰렁해졌다. 벨져는 필요한 정보를 추려 기사단 쪽에 전달하겠다며 나섰고, 사밀레이나는 그를 데려다주러 동행했다.
두 사람이 창을 훌쩍 넘어가는 모습을 보던 루이스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루드비히를 힐끔 돌아보았다.
“너는 말 안 해?”
“뭐를요.”
“플리에 대한 것 말이야. 우리도 우리지만, 너는 연인이잖아. 그것도 만난 지 꼬박 일 년이 됐고. 그런데 그저 듣고만 있길래.”
“보여주는 사랑은 취향 아닙니다. 제 것을 굳이 나눌 이유가 있겠습니까.”
“누가 다 말해 달래? 그냥 크게 기억나는 것 하나 정도나 듣자는 거지.”
“글쎄요…. 결혼?”
“뭐?”
루이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영어 단어를 잘못 외운 건 아니지?”
“내가 당신입니까?”
“아니…근데 무슨…결혼을….”
“물론 웨딩드레스는 안 입었습니다만….”
“그게 결혼이야?”
“그럼 결혼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아는 사람을 죄다 긁어모아서, 공작새처럼 꾸미고, 그럴싸한 말이나 주고받고 반지를 끼워주는 행사를 치러야만 결혼입니까?”
“꼭 그럴 필요는 없지. 그럼 너희들이 생각한 결혼은 뭔데? 그래서 둘만의 결혼식을 한 거고?”
“아뇨. 못 했습니다.”
“…뭐야, 진짜….”
“다만,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돌아오면 숲에서 둘만의 결혼을 하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플리아나스에 대한 소식이라면 목 빼고 기다리는 연합 이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불청객은 빼고요. 봄이 끝나 따스함이 무르익은 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해 질 무렵, 태양이 저무는 수평선을 등지고.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새하얀 원피스에 들꽃을 엮어 만든 부케로, 그저 두 사람의 마음만 가지고 떠날 겁니다.”
“…….”
“못 할 확률이 더 높은 결혼이라는 건 압니다.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다만….”
“…….”
“기적이든, 신이든, 운명이든, 우리가 아는 그 모든 것이 도와 플리아나스가 살아 돌아온다면….”
루드비히가 선심을 쓰듯 말했다.
“당신 정도는 보러 오세요. 남매라면서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이 결혼을 찬성할 줄 알았어?”
“그럼, 아닙니까? 플리아나스가 원하는 일인데?”
“아니. 찬성하겠지.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뭔들 못 하겠어.”
그렇게 말하던 루이스는 돌연 울적해졌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까닭이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구태여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황급히 털어냈다.
이제 남은 것은, 움직이는 일뿐이다.
✽
그날은 유독 날이 찼다. 봄이 완연해진 지 오래건만 꼭 겨울이라도 된 것처럼 손발이 급히 식었다. 종전의 날이 밝기도 전부터 내린 부슬비 때문에 흙은 부드러웠고, 젖은 꽃 냄새가 바람에 뒤엉켜 코 안쪽으로 느릿느릿 스며들었다.
내린 부슬비 때문에 흙은 부드러웠고, 젖은 꽃 냄새가 바람에 뒤엉켜 코 안쪽으로 느릿느릿 스며들었다.
안타리우스 소속 연구소에 가는 길은 웃자란 가지와 바싹 마른 덩굴, 볼품없이 엉킨 잡초 따위로 가득한 숲길이었다. 나뭇가지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이따금 똑똑 떨어져 코나 미간을 차갑게 적셨고, 이따금 살갗에 닿는 잔가지의 감촉이 따끔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다행히도 검을 쓰는 이가 둘이나 되어서, 플라네타리스와 벨져가 양쪽으로 서서 거슬리는 것들을 적당히 쳐내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그럼, 이쪽에서 다시….”
창백한 색의 건물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자 수풀에 일행을 숨긴 루이스가 낮게 말했다.
“앞에서 버틸 수 있는 벨져와 휴톤이 먼저 나서는 거야. 사밀레이나가 두 사람을 보조할 거고, 적당히 진입해도 좋을 때 신호를 보내 줘. 그럼 우리는 둘로 나뉘어서 들어갈 거야.”
“저는 혼자 들어가겠습니다. 알아봐야 할 정보가 좀 있거든요. 연합과 함께 움직인다는 정보가 들어가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게 좋겠다.”
“나도 빠질 거야.”
“왜?”
“왜라니?”
플라네타리스는 괴상한 질문이라도 들은 것처럼 반문했다.
“나는 친구를 위해 움직이는 거지, 안타리우스니 연합이니 하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플리를 해치려 하는 게 내 적이라는 뜻이야. 내게 중요한 건 신념이지 소속이 아니야. 그러니 함께 움직일 이유가 없어. 그리고….”
“…….”
“여신께서 조금 이상한 말씀을 하셔서.”
플라네타리스는 그 이후의 말을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그 이상 설명해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다만 출발하기 전에 점을 쳤을 때 점괘가 도저히 좋지 않았다. 전해 들은 예언조차도 불길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누구도 쉽게 믿거나 긴장을 풀어서도 안 될 것 같았다.
다행히도, 혹은 당연하게도 누구도 그녀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사무적인 어조로 전술을 되짚던 루이스는 그저 적당한 시간에 맞추어 흩어지자고만 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어두운 표정으로 떠났다.
“돌아가도 돼.”
루드비히와 나란히 걷던 루이스가 말했다. 루드비히는 코웃음을 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왜요. 겁이라도 납니까? 그래서 아량을 베푸는 척 의무라도 질 셈입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려. 겁은 나지 않지만, 만일 플리아나스와 대치해야 할 때 네가 있다면 플리아나스가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허, 참. 한 식구라면서 당신은 동생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요. 사랑한다는 건 모든 의견에 동의한다는 게 아닙니다. 나는 플리아나스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아요. 그녀 또한 내게 종종 그랬죠. 그게 우리가 결정적으로 따로 움직이는 이유고, 그녀가 지하연합에 소속감을 품게 된 이유였습니다.”
“…소속감을 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선악의 경계가 희미한 여인이었다.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과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결과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칼처럼 벼리고 방패처럼 단단해졌다.
인간은 결국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으며, 삶의 무게는 누구에게도 감히 전가할 수 없다고 믿는 이가 삶과 죽음을 함께하고 그 고단함을 나눠 드는 집단에 쉽게 소속될 리가 없었다. 개인주의의 성향이 강했던 플리아나스는 요기 라즈의 권유에 서류를 제출하면서도 자신에게 전술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못박은 일이 있었다.
플리아나스는 타인에게 다정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은인인 루이스가 베푼 은혜의 무게 이상을 돌려주지 않았다. 아니, 돌려줄 때는 있으나 그것은 순전히 플리아나스가 내킬 때에 한해서였다. 그녀는 봄철 날씨처럼 변덕스러웠고, 아무도 그녀를 종잡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불사조가 금세 날아갈 것이라 예상했다. 그녀를 위한 횃대는 만들어도 새장은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불사조는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렀다.
“아직도 플리아나스가 지하연합에 있는 이유가 의무감이라고 생각합니까?”
“…….”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그녀가 조금 가엾군요.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는데.”
“잠깐만.”
둘의 대화를 자른 트리비아가 말했다. 그녀는 연구소 본관의 왼쪽으로 돌아서 가는 길을 선택했는데, 그 과정에서 만난 두 명의 강화 인간을 처리하느라 옷에 피가 조금 튀어 있었다.
“플리가 안타리우스에 굳이 들어간 이유가 연합 때문이라는 소리야?”
“그게 아니라면, 사리사욕이라도 챙기러 들어갔겠습니까? 아니면 제 명령이라도 들었겠습니까. 그런 것으로는 플리아나스를 잡아둘 수가 없지요.”
“…….”
루드비히는 명백히 선심 쓰는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안타리우스에서는 능력자의 능력을 완전히 ‘개방’하거나 ‘변형’하는 연구를 비밀리에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러려면 잠재력을 가진 실험체가 필요했겠지요. 비능력자 혹은 클론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포교와 납치를 통해 충족하려 했지만, 최근 능력자들이 연대하며 그 부당한 행위에 맞서는 탓에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요.”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방해 세력을 먼저 제거하겠지.”
“그게 그들이 지하연합을 먼저 치려고 했던 이유입니다.”
“그걸 플리아나스가 알았다고?”
“정확히는 나를 통해 알았습니다만…뭐, 그렇죠. 그녀는 그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정보를 캐러 갔습니다. 관련된 자료를 완전히 파기해서 그들의 뜻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또한 최근 연이은 전쟁으로 인력 손실이 큰 연합을 지키기 위해, 안타리우스의 관심을 돌릴 필요도 있었습니다. 당장 강화 인간 부대가 사무실에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우린 다 죽겠지. 하지만, 그건 결국 플리가 우리 대신 위험해졌다는 소리밖에 안 되잖아. 우린 그런 희생을 강요한 적이…”
“없겠죠. 강요받은 희생은 아닙니다. 그녀가 선택한 희생이죠. 저는 그게 이타심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벨져 홀든 또한 같은 판단을 했고요. 그건 이기심입니다.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희생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늘 그랬듯, 누구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눅눅한 공기로 둘러싸인 탑의 계단을 따라 올랐다. 차가운 공기에서는 으스스함이 묻어났으며 벽에 난 자그마한 창문에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가 턱턱 날아와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가장 높은 곳에 능력 개방 연구에 대한 샘플과 자료를 보관해 두었다는 담당자의 기록이 있어. 관계자 외 출입 엄금인데…관리자는 휴톤이 처리했다고 하고. 그런데 왜 열쇠가 이렇게 녹이 슬었지?”
“쓸 일이 많지 않았나? 사실상 방치되고 있었다거나.”
“혹은 실험체를 통제할 수 없어졌거나.”
“하지만 지나치게 허술해. 이쪽은 담당하는 경비조차 없었어.”
“그런 곳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계단을 오르며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던 일행은 중간쯤 올라오자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다물었다. 스산하고 오싹한 기분이 엄습했다. 어떻게든 애를 써서 건물의 설계도까지는 손에 넣었으나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여기까지 왔는데도 그 꼭대기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 그들이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아.”
조용히 뒤따라오던 사밀레이나가 작게 탄식했다. 그녀의 발밑에서 작은 뼈가 와작, 소리를 내며 부스러진 까닭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선계단을 따라 올라가기만 하던 사람들은 그제야 발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걸어 올라왔던 길을 내려다보았다. 계단의 구석이나 벽에 군데군데 축축한 것이 튄 흔적이 있었고, 나무껍질이나 잘려 나간 가지로 추정되는 물건들이 있기도 했다. 담쟁이덩굴처럼 보이는 것이 벽에 거뭇거뭇하게 달라붙어서 기괴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잘 보면, 뼈 조각들이 굴러다니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무슨 뼈인지 알 수 있나?”
벨져가 묻자 사밀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양팔을 들어 가볍게 손짓하자 눈동자가 주홍색으로 타오르며 허공에 숱한 금색 실이 생겨났다. 그것들은 사밀레이나의 지휘에 따라 각지에 흩어진 짝을 찾아 본래의 모양으로 조정되기 시작했는데, 토끼나 오리, 다람쥐와 고양이 따위의 크지 않은 동물들로 추정되었다.
다만 뿌리는 아무리 보아도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 궁금증은 그들이 십 분쯤 더 걸어 올라온 뒤에야 풀렸는데, 점점 굵어지는 뿌리 사이로 매끈한 속눈썹이 나 있었다.
“이건….”
“예사 식물이 아니라는 건 알겠군.”
“으. 이거…눈이잖아. 트리비아, 안에 금색 눈동자 봤어?”
거대한 나무뿌리와 그 근처의 말라비틀어진 식물의 흔적, 뼈 조각만 남은 동물들. 그들은 번쩍이는 노란 눈동자를 보자마자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저 꼭대기에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런 것이 계단에 널려 있는 것일까. 일종의 직감 같은 것이 그들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것이 이 탑에서 나오는 순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끔찍한 비극이 시작될 거라고.
하지만 이내 불안감 또한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랐다.
만일 그 괴물의 품에,
그들이 찾으러 가는 이가 잠들어 있다면?
✽
“…거짓말이지.”
절망에 잠긴 음성이 높직한 천장에 닿아 메아리처럼 퍼졌다. 잠겨 있지도 않은 문을 연 사람들은 그저 말을 잃고 눈앞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 감정을 무어라 해야 할지,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삭막한 생김새의 잿빛 탑의 꼭대기에 다다른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소 생뚱맞게 펼쳐진 정원이었다. 투명한 유리로 동그란 돔 형태의 지붕을 얹은 형태의 정원은 천정이 무척 높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고,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샹들리에의 불은 절반 이상이 꺼져 있어서 갈색빛을 퍼뜨리고 있었다. 끼익, 끼익, 쇠고리가 서로 부딪치는 음산한 소리가 그들의 고막을 박박 긁어댔다.
그들의 시선은 바닥을 거미줄처럼 수놓은 나무뿌리를 향했다. 초조한 듯 빠르게 깜박이는 뿌리의 눈동자는 오싹한 금색이었다. 그 눈동자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한 곳을 쏘아보았는데, 그 뿌리가 시작된 곳으로 일제히 향하는 풍경에 벨져는 주먹을 꽉 쥐고 숨을 삼켰다.
플리아나스는 갇혀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횃대도, 새장도 없었다. 그러나 불사조는 날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채로 크리스털로 된 커다란 잔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그 잔의 아래에는 큼직한 상자가 붙어 있어서 마치 트로피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것이 안타리우스가 감춰둔 연구 자료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았다. 자물쇠도, 경보 장치도 없었다. 그러나 도저히 열 수 있는 물건처럼 보이지 않았다.
“밟지 마.”
플리아나스를 쳐다보고 있던 눈동자가 일제히 루이스를 향했다. 저도 모르게 뿌리를 밟고 있던 루이스는 얼른 물러났다. 영웅의 시선이 뿌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검어 보이는 뿌리는 위로 올라갈수록 적갈색이 되었다가, 너무나도 익숙한 코코아색을 띠었다. 모를 수 없는 머리카락이었다. 이 뿌리가 모두 그녀였다고? 그게 말이 돼?
당황한 루이스가 무어라 하려던 찰나 벨져가 검을 들었다. 긴 검을 뽑아 든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검으로 뿌리를 찔렀다. 찔린 눈이 꿈틀거렸다. 검사를 쏘아보고 있던 눈동자들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닫았다.
창백한 뺨에 피눈물이 흘렀다. 플리아나스가 눈을 뜨며 말했다.
“밟지 말라고 했더니 찌르는 거야? 스승님.”
“너는 누구지?”
“제자를 여럿 두었어? 아닌 줄로 알았는데.”
“너는 플리아나스가 아니야.”
어둑한 정원 안에서도 홀로 형형히 빛나던 금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럼, 어떤 게 당신의 ‘플리아나스’인데?”
“궤변을 늘어놓을 거라면 그만두도록.”
“정말로 궁금해서 그래, 말해 봐. 벨져 홀든. 내가 당신들의 제자가 아니고, 동료가 아니고, 동생이 아니고, 연인이 아니라면.”
“…….”
“그렇다면, 나, 죽일 수 있어?”
그녀가 입을 벌려 웃었다. 가지런한 앞니가 드러났다. 찡그리듯 웃는 얼굴은 일순 섬뜩한 인상을 풍겼다. 그녀가 피눈물을 닦자 뺨이 붉어졌다. 상체를 살짝 움직이자 우득, 우둑, 뼈가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뿌리가 일렁였다.
“알겠나? 사밀.”
벨져가 물었다. 내내 상자를 쏘아보던 사밀레이나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모르겠어. 아니, 알겠어. 모르는 것이 있고, 아는 것이 있어.”
“모르는 것부터 말해 봐.”
“저 상자를 여는 방법. 그걸 모르겠어.”
“아는 건?”
“플리아나스의 능력이 변했어. 정확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