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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 ? 페스티아 프로벨


신발 코, 응접실 문 너머, 사람들의 말소리가 끝나가는 인파의 끝을 주시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혼자가 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그녀와의 만남을 기다리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던 검은손의 온기를 되새기려 텅 빈 주먹을 쥐는 습관이 생긴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원체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두 번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것처럼 품을 파고들다가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망상처럼 사라져 버리는, 빈자리에 익숙해질 때쯤 너무나 당연하게 손가락을 엮으며 곁으로 다가와 웃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고양이같은 발걸음을 찾기 위해 바닥으로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겨우 인정했다. 그녀가 사라졌다고.

매일 아침 마틴 챌피가 챙겨 오는 신문에는 시시콜콜한 정계 싸움이 한 달째 1면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동을 저지르던 능력자들이 자취를 감추니 신문은 읽을거리가 없었고 맨 뒷장의 낱말 퍼즐이나 맞추자며 동그란 색연필을 들고 온 하랑이 계절이 바뀌어간다며 제 나름 또박또박한 글씨로 알파벳을 써 내려갔다. 벌써 일 삭이 흘렀나. 언제나처럼 눈을 접어 웃으며 다가와 무거운 얘길 잘만 하던 그 목소리가 이제는 잊혀지는 것만 같았다. 가지런히 앉아있던 무릎 위로 신문이 가볍게 날아왔다. 두 눈을 가린 천을 풀어내지 않아도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진 기사를 읽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 내용은 생체 실험과 관련된 것이었다.

영국 덤프리스의 어느 공터에 난데없이 큰 건물이 생겨났고 제보자에 의하면 그곳은 머리가 아플 정도의 악취가 나는 부드러운 바닥이었다고 한다. 사라진 사람들의 물건들이 발견되어 수색을 실시했으나 단 한 명의 사람도 발견하지 못해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짧은 내용을 눈여겨보다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 검은 것들이 우글우글하구만. "

응접실의 그 누구도 입 밖으로 질문을 뱉지 않았으나 하랑은 헛기침을 하며 짐짓 호기롭게 속삭였다. 형씨들이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죽음'이 가득한 곳이라고. 검게 내려온 그의 앞머리 사이로 붉은 눈이 일순간 빛난 것 같았다. 침묵이 섞인 집요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의 것이 아냐. 그 너머에서 온 것이지."

하랑의 말에 응접실 쇼파 끝머리에 걸쳐둔 자켓을 쥐어들고 자리를 박차나갔다.

 

 

페스트는 오만했다. 감각을 잊은 사람처럼 상황과 감정을 제대로 이어내질 못했다. 동정과 연민이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무자비한 사람이다. 그의 걸음걸이를 따라 작은 죽음들이 웃음을 잃지 않았다. 모두 살아있는 것들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다. 잔혹한 정도에 대해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나, 이유 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아녔기에 확인해야만 했다. 달력 한 장을 뜯을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면서 위험천만한 행동으로 세계를 적으로 돌렸다면, 가서 화라도 내야 하는지. 그럼 당신은 가라앉은 나의 분노 속에서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투정으로 포장했음을 눈치채고 손을 내밀어줄 텐데.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단독적으로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적막만이 감도는 차가운 건물을 노려본들 무엇이 바뀌겠는가. 허나 섣부르게 나아갈 수 없었다.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작은 쥐새끼가 몸을 숨겼다. 만일 재단의 누군가와 동행을 했고 그자와 이 사건이 그녀가 한 것이 아니라는 내기라도 걸었더라면 상대방은 내게 언제부터 승산 없는 일에 목을 올렸냐며 코웃음 쳤을 것이다. 주인을 불러오기라도 한 건지. 그림자 위로 더욱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기울어진 천칭이 그려진 로브. 그림자가 덮힌 얼굴 아래로 보이는 파란 미소. 검은손과 검은 역병과 검은 그녀가…….

"………."

가면조차 쓰지 않은 채 물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은 어쩐지 순수하기까지 했다. 생체 실험이 이루어졌다면 혹시, 결국, 끝끝내 그녀의 세포를 채취해 클론이라도 만든 것은 아닐지. 내 앞에 서있는 '그것'이 그간 알아오던 사람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감각에 그림자가 목 끝까지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적막 속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것'이 아닌 '그녀'를 직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왔어요? 용케 나인 걸 알았네."

후드를 벗어 내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가짜는 아니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물음은 아니였다.

"화내지 마세요. 필요에 의해 속하게 된 거니까."

나 아팠어요. 으레 애살맞은 태도로 검게 물든 오른팔을 들며 어리광 부리는 가벼운 목소리에 어금니를 짓누르며 말을 삼켜야 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던 거냐고 물었습니다. 두건을 풀고 눈을 마주하며 재차 물어보았고, 그녀가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양손을 들어 올리고 나서야 아프다던 말과 함께 참극의 현장이 떠올라 혀를 찼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이며, 족쇄 같은 검은 로브, 검은 팔까지. 삼켜지지 않은 건 겨우 얼굴뿐임을 알아달라는 것 마냥 자신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아 영원한 어둠 속에서 안식을 취하고 싶었다.

"이유가 있다면 말해주시오."

그걸 물어볼 줄 알았다며 그녀는 나를 따라 혀를 찼다. 거울을 보고 따라 하는 아이처럼 나의 언행을 하나하나 자신의 것으로 습득하던 얼굴이 이렇게나 보기 괴로울 줄은. 품에서 저울을 꺼낸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문을 열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게 이 저울이더라고."


"………."

부모가 노력하던 작은 우물에서 벗어난 세상에는 기울어진 것들 뿐이었다. 그녀가 쥐고 있는 저울 또한 비웃는 입꼬리처럼 기울어져있었다. 문을 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이 또한 물음이 아니었다. 재단의 행보를 모르지 않을 터인데, 그 앞에서 당당히 인식의 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당돌함에 기함을 토했다. 자진自盡하기 위한 삶은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그 누구도 오래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악취는 심해졌다. 그녀에게서 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공간에서 중압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으나 두 다리로 서있는 것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발 밑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악취는 그림자가 시작되는 나의 발 끝에서 올라왔다.

그녀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웃는 얼굴이었다. 방해하지 말라는 집요한 시선으로 천칭을 눈 앞에 들이밀었다. 안타리우스에 세뇌당한 것은 아니었다. 땅이 움직였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나서야 딛고 있던 것이 길이 사체 밭이였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땅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을 무어라 칭해야 할  지 모르겠다. 자유의지를 가진 덩어리들이 뭉쳐 산을 이루기도, 흩어지며 섬을 이루기도 했다. 그녀와 나는 실시간으로 가까워지다 멀어지길 반복했다. 수많은 희생을 치러가며 이루려는 그 목표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다 보여주고 말았는데. 내 계획에는 당신이 없었어요."


"………."


"정말 많은 방해가 있었는데 운명은 결국 내 기도를 들어주셨네요."

덩어리들이 엉겨 붙어 몸을 불리기 시작하더니 그녀와 나란히 서있던 순간들이 무너지고 공간을 재구성했다. 기쁜 얼굴을 한 그녀는 덩어리들에 의해 벽에 꽂히기도 했고, 하늘을 뒤덮어가며 대롱대롱 매달리기도 했다. 손 끝으로 베베 꼬던 흑자색 머리칼이 사정없이 흔들림에도 천칭은 자신의 각도를 유지했다. 기울어진 것이 옳기 위해선 주변이 무너져야만 하는 거였을까. 

죽은 것들이 기울어진다.
세계는 평행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그녀가 쥐고 있는 저울은 수평을 이루었다.

지나치게 자비로운 절망이었다.

 

 

 

 

 

1934년, 영국 덤프리스에서 문이 열렸다.
검은 손이 세계를 무너트리고 이쪽 세상에 안녕을 고했다.
빛을 잃고 어둠만이 가득한 시간이 영원히 이어졌다. 

 

 

 

 

 

@ztefa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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