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테이 X 차은하
이 삶이 어디서부터 잘못 끼운 단추인지 모르겠다.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면 태생이 잘못되었는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잘못이었는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능력자 중에서, 그 어떤 능력자도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은 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차은하는, 남들보다도 그런 고민을 더 강하게 하는 자였다. 후, 고민이 담긴 숨을 내뱉은 차은하는 뒤집어 쓰고 있던 검은 후드를 벗어내렸다. 부드러운 갈색 빛깔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붉은 눈은 새벽의 공기를 담고 있었다.
새벽은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당신은 왜 안타리우스에 들어갔나요? 차은하는 늘 누군가의 시선에서 그 질문을 읽고는 했다. 그랑플람의 유망주, 영원한 선역에만 서 있을 것 같던 온실 속의 화초,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났었던, 그럼에도 되돌아온 나약한 존재가 바로 차은하, 본인이었다. 은하는 문득 제 온 몸 곳곳의 상처에서 통증을 느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게 맞을텐데, 여전히 문득문득 아파오고는 했다. 안타리우스에 입단한 이후, 여러가지로 얻었던 상처들의 진통이었다. 아, 은하는 욱신거리는 자신의 팔을 꾹 눌렀다. 진통이 올 때마다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면, 태생 자체가 잘못되었는가. 은하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던 것들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어머니도, 동생도, 그리고, 연인과의 사랑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은하는 서서히 눈을 떴다. 통증은 멎었으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이 은하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고 지나갔다.
달빛이 내려오는 숲속은 스산했다. 여름날의 더위가 거짓이라도 되는 듯, 등골에 소름이 끼칠 정도의 기온. 이 곳이 맞는가, 은하는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안타리우스에서 하달받은 임무, 그것도 제게 비밀스럽게 전달된 임무였다. 오늘 밤은 그랑플람과의 접선이 있는 새벽이라고 했던가… 왜 그랑플람과의 접선에 하필 저를 보냈나? 왜 하필 그곳에서 도망친 나를? 배신자라고 생각하고 있을텐데. 굳이, 이거, 설마.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여러 생각을 하던 은하의 생각이 어느 순간 뚝 끊겼다. 부스럭거리는 뒤편의 수풀 소리가 단절의 원인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것을 마주 한 순간, 은하의 몸이 석화가 되기라도 한 듯 우뚝 멎었다.
여전히 빛나는 검은 머리칼, 그리고 그 바로 아래쪽으로 보이는 안대. 은하는 직감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함정이다.
“ 당신…! ”
“ 쉿. ”
…여기까지.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 저를 감싸는 익숙한 온기와 그에 동반되어오는 향. 그리고 이어오는 목소리에 점차 은하의 의식이 흐려졌다. 잠깐, 은하의 목소리는 결국, 더 이어지지 못한 채 어둠속으로 잠겨갔다.
툭, 의식을 잃은 여인을 받아내는 행동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이 제가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여인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달빛 아래 윤기있는 흑발 위로, 빛이 따라 흘러내렸다. 그가 쓴 안대가 살짝 흘러내려, 검은 천 사이로 푸른 눈이 드러나고는 했다. 하태의, 이름의 주인은 품 속에 안긴 여인을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걸음을 옮겼다.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까지, 은하의 흔적을 쫓아 잡아채기까지 얼마나 길었던가. 곧 있으면 사라짐을 느낀 사냥꾼이 쫓아올 것이다. 하지만 두 번 다시는 뺏길 수 없다. 너희들이 데려가겠다면 나는 흑영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어둠 속에 숨어 흔적을 지우리라. 그리 생각한 태의는 조급하게 걸음을 놀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그래서, 테이씨가 은하씨를 몰래 빼내왔다고요? 안타리우스에서? ”
“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소. ”
드디어 미쳤어요!? 마틴의 비명이 그랑플람 건물 한 구석에 있는 은하의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머쓱하게 제 뒷목을 문지른 태의는 침대에 누워있는 은하를 바라보았다. 그 몇달을 못 보았다고, 은하는 더 수척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더 아련해진 눈빛의 태의를 향해, 한숨을 내쉰 마틴은 어깨를 으쓱였다. 언제 깨어날지는 본인도 모른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고개를 끄덕인 태의와, 그와 동시에 마틴은 방 문을 나섰다. 어떤 마음인지는 알지만, 떠난 사람은 붙들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떠난 사람은 붙잡을 수 없다라, 태의는 천천히 잠든 은하의 볼을 쓸었다. 살짝 투박한 손끝이 은하의 부드러운 볼을 쓸어내렸다. 은하, 은하. 은하. 몇 달 동안 부르지 못했던 이름을 되새기는 목소리가 낮게 잠겨 있었다. 그 입술에서부터 빠져나온 숨결에, 은하의 속눈썹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 네 어머니도, 동생도. 네가 도망간 동안 전부 다 죽었다. ”
몇 년 만에, 그것도 강제로 재회한 아버지의 첫 마디는 단숨에 숨을 가져가는 기분이었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선택한 행동이었는데. 돌아오는 업보는 너무나도 무겁고, 견디기 힘든 결과로 돌아왔다. 제게로 꽂혀오는 가시같은 말들에, 은하는 머리를 감싸쥐고 웅크렸다. 뇌가 미친듯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어, 은하는 그 어디에도 시선을 고정할 수가 없었다. 짧은 시간, 둘 곳 없이 시선을 굴리던 은하의 시선이 아버지와 맞닿았다. 가치 없는 물건을 보는 듯한 권위적인 눈빛. 어머니도 동생도, 죽는 순간까지 전부 너를 원망스러워 했다는 말은 흐려져 더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어야, 하는데… 강박적으로 중얼거리는 은하의 시야가 흐렸다. 그러지 마세요, 거짓말 하지 마세요, 제발, 제발요… 바닥에 웅크려 애원하는 은하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갈색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삐져나왔다. 한참을 떨던 은하를 향해, 한 손길이 내밀어졌다.
“ 안타리우스로 가라. 그분만이 네게 새 시작을 할 기회를 줄 것이다. ”
아무리 시작이 잘못된 자라고 해도 기회는 있어야겠지. 그것이 비록, 태생부터 잘못되어 정신머리가 썩었다고 해도 말이야. 은근한 아버지의 미소는 무기가 되었으며, 은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기엔 충분했다.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지 말거라. 목을 죄여오는 압박은 곧 탈력감이 된다. 역시 나는 태생부터가 잘못이었던걸까? 그저 나로써, 차은하로써 살고 싶었던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을까? 내가 사랑하던 전부가 사라졌다. 모든 것을 잃은 은하는, 힘없는 손길로 눈 앞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은하는 스스로를 잃었다.
조선의 체탐인, 하태의는 요 며칠간 상당한 의문에 휩싸여 있었다. 그 원인은 자신의 연인, 차은하 때문이었다. 은하는 이 전, 자신에게 온 편지를 읽고 급히 뛰어나갔더랬다. 그 이후로 쭉, 정신이 없던 저 상태. 아무리 신경을 덜 쓰려고 해도, 태의가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오늘도 저 상태인가, 유독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던 은하가 마침내 태의의 손을 먼저 잡아왔다.
“ 우리, 이야기좀 해요. ”
“ 좋습니다. ”
그렇지 않아도 하도 궁금했던 참이었다. 사람이 많이 없는 카페 한복판에 마주보고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사이로 침묵이 돌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또는 간간히 들리는 대화 소리와 잡다한 사물의 소리까지. 한참이나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던 두 사람의 사이로, 마침내 무거운 소리가 끼얹어졌다.
“ 저기, 테이. ”
“ 어떤 연유로 대화를 청하셨습니까. ”
침묵이 감돌던 만큼, 분위기가 날카로웠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목소리에 본인이 당황한것도 잠시, 테이는 테이블에 얹어져있던 은하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듯 잡았다. 지긋이 입술을 깨물던 은하는, 그런 테이의 손에서 제 손을 힘주어 잡아 뺐다. 온기가 빠져나간 손 틈으로 찬바람이 비웃듯 빨려들어갔다.
“ 우리,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
“ 지금 무어라고 했소? ”
하태의는 27년의 삶을 사는동안, 자신이 말과 그 말에 대한 저의를 알아듣지 못한 적은 없다고 자부하며 살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제 손을 뿌리치고 급히 일어나는 은하를 머릿속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드르륵.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눈 앞에서 마주보던 시선이 뒤집혔다. 급히 따라 일어난 태의가 은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았으나, 은하는 그 손을 그저 날카롭게 쳐낼 뿐이었다.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은하, 그게 무슨 말입니까. ”
“ 미안해요. ”
… …행복하세요. 반짝이던 눈의 빛깔을 잃은 은하가, 쓴 웃음으로 답했다. 그 말에 홀리기라도 한 듯, 태의는 다시 한 번 잡으려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던 은하는 뒤돌아 걸었다. 아니, 처음은 걸어나갔으나 후에는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이거면 된거야, 이거면 충분해. 더 잃을 수는 없어. 그리 자신을 위로하는 은하의 눈에서는 눈물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태의는 그저, 멀어져 점이 되어가는 은하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두 연인의 마지막 모습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직후, 은하가 실종됐다. 은하를 보호하던 그랑플람은 당연히 뒤집어졌으며, 영혼이라도 빠진 듯한 태의의 모습과, 절묘하게 등장 시기가 맞은 안타리우스의 새 신도는 한 추리를 어렵지 않게 줄 수 있었다. 갈색 머리, 붉은 눈, 땅을 뒤흔들던 능력들. 부분부분 조각난 단서들을 짜맞추던 태의는 어떤 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목표가 생기니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여러 곳을 수소문해 차은하가 맞고, 강제적인 실험을 받았다는 것도 알았다. 은하를 구해오기 위해 사람을 매수해 거짓 지령을 전달하고, 일정에 맞춰 은하를 구해 데려왔었다. 어떤 뒷감당을 해야하던지, 저지른 행동은 후회하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태의의 귓가에 침대 시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닿았다. 어느새 일어난 은하가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왜 이랬어요? ”
은근한 노기가 담긴 목소리를 뱉은 은하는, 제 몸 위에 덮여진 이불을 손으로 꾹 쥐었다. 분노 탓에 이불을 쥔 은하의 손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대체, 나한테, 왜. 당신은, 끝까지, 젠장! 조각조각 단어를 뱉던 은하는 밀려오는 두통 탓에 머리를 꾹 감쌌다. 중력 탓에 흘러내린 신도복 사이로 은하의 여린 팔이, 주삿바늘이 남기고 간 멍과 흉터는 태의의 마음을 찢어지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조심스럽게 은하에게 다가간 태의는 은하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한참이나 씨근덕거리던 은하는 지쳤는지 태의를 밀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 …테이, 알잖아요. 깨진 그릇은 다시 쓸 수 없어요. ”
그러니까 이제 그만, 그만 가세요. 나와 함께 있으면, 당신마저 잃게 될까봐 두려워요. 그리 말하는 은하 역시도, 태의의 품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미리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오. 제 품 안의 연인을 좀 더 끌어안은 태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여전히 차은하는 하태의를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후회로 짙어진 밤은 여전히 길고 버겁기만 했다.
@N0ir_Sunf1ow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