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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루

​이글 홀든 ? 카이

  그 날은, 어쩐지 불길한 날이었다. 옷의 단추를 하나 빼먹고, 머리끈을 잃어버리고, 전날 밤 세차게 내린 비가 만든 물웅덩이를 잔뜩 밟는 그런날. 잔뜩 엉망인 채로 도착한 병원은 어둑어둑했다. 그곳에서 마주한 너는 검회색 배경 속에서 유일하게 하얀 옅은 신기루였다. 나와 제대로 시선도 마주하지 못하던 네가 데리러 와 줘서 고맙다고, 무리한 부탁을 들어돌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했을때, 불길한 마음을 뒤로 미뤘다. 매일같이 점점더 새하얗게 변하는 네가 내게하는 유일한 부탁이었다. 너를 차마 말릴 수가 없어서, 그렇게 너를 데리고 공성에 참여했다.

 우리는 꽤나 합이 잘 맞았다. 나는 멀리 있는 적도 확인하고 견제할 수 있었고, 너는 가까이 다가온 적을 한순간에 녹여버릴 수 있었다. 싸움은 언제나 내 흥미를 끌었고, 흩날리는 검무 사이로 독을 뿜어내는 너는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모든 불안과 걱정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내게 내린 벌일까. 잠시 연합원들과 이야기를 하다 너를 돌아봤을때, 쓰러져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너는 내 심장을 멎게 하기 충분했다.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진 너는 벌써 몇일째 잠들어있다.

 

"홀든, 진료시간이야. 비켜주겠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능글스런 목소리에 상념에서 깼다. 까미유 데샹. 유전학 연구에서 가히 일인자라고 불리는 의사이자 치유계열 능력자, 그리고 네가 두 해동안 지내온 병원의 소장. 전장에서 만났다면 달려들어 발목이나 베어버렸을 재수없는 인사지만 어떤 의사를 찾아가도 고통도 멎지 않던 네가 유일하게 차도를 보이는 병원의 의사였기에 나는 오늘도 그에게만은 약자가 되어 얌전히 물러섰다. 새하얀 복도에서 멍청하게 너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을때, 이토록 깊은 절망을 느낀다. 홀든가의 막내공자였던, 지하연합의 제멋대로인 망나니가 아무것도 못하고 오직 닥터의 진단만 기다려야한다니. 얼마나 우습고도 한심한 일이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닫혀있던 새하얀 문이 열렸다. 그 속에서 나온 새하얀 의사는 썬글라스를 다시 끼며 무심하게 말했다.

 

"홀든, 할 말이 있어. 따라와."

 

"뭐...뭔데. 뭐 설마, 상태가 나빠지거나 한건 아니지? 네 놈이 치유 능력면에선 따라올자가 없다느니 뭐니 했잖아."

 

"시끄러워. 복도에서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따라오라고. 상태가 나빠진건 아니니까 칭얼거리지 마."

 

 그가 향한 곳은 그의 진료실이었다. 데샹은 파일철을 가볍게 책상위로 던지고 의자에 앉고서는 턱짓으로 반대편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대체 뭔데?"

 

"...지금 카이, 그녀의 보호자가 너로 되어있지?"

 

"그런데?"

 

"지금 이상태로는 언제 깨어날 지 몰라. 몇일 뒤에 깨어날 수도, 몇년 뒤에 깨어날 수도 있지. 그렇지만 매번 귀찮게 하는 당신 상태를 보니 하루 빨리 깨어나기를 바라는거 같아서."

 

"그건 당연한 거 아냐? 당연히 빨리 깨어나면 좋지."

 

"뭐, 그래서 한가지 제안을 하려 해. 홀든가도 뛰쳐나온 당신이니 한번 더 배신하는 건 쉬운 일이겠지?"

 

"...뭐?"

 

"제안서야. 읽어보고 답해. 당신이 어렴풋이 눈치챈것도 알고 있고, 이쪽에서도 당신을 원하니까. 되도록 빨리 답해줬으면해. 늦어도 일주일. 일주일이 지나면, 못쓰게 되는 재료가 있거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봉투를 들고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나오기 전 뒤에서 낮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떨리는 손으로 꺼낸 갈색 봉투 안에는 서류뭉치가 한가득이었다. 제일 앞면에 적힌 글자-안타리우스-는 어느정도 확신하고 있던 짐작이 사실임을 판명해주었다.

 

"하..."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이주일 전의 공성전? 지하연합으로 들어온 그 때? 그것도 아니면, 처음 그 애랑 마주친 그 것부터 모든 것이 계산된 것이였을까. 사랑이란 이름의 덫에 걸린 어리석은 독수리. 이제는 답을 알면서도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이제는, 그 무엇보다도 그녀의 한 줄기 웃음이 더 소중해졌으니까.

 

 

 

 

 

정신이 들었을 때는 새하얀 방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정면에 굳게 닫힌 새하얀 문만 있는. 아... 모든게 꿈이었던 걸까? 이글이 사라지고, 그 사람을 만나고, 같이 이글을 찾으러 다니던 모든게 꿈이었던 걸까? 아니... 이글을 만났던 것도, 내 외로움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몰라. 처음부터 이 하얀 방에서 난 나간적이 없었던거야. 아주 오랜 꿈을 꾸고 있었던건가봐. 새하얀 문, 새하얀 타일, 새하얀 침대와 이불. 이 곳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물질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 하나였다. 백색의 어둠에 삼켜지듯, 스러져 엎드렸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뜨거운 전열빛이 온 몸을 비췄다. 그리고 굳게 닫혔던 하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서는 뻔했다. 닥터의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새로운 독극물을 주입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생각했을 때였다.

 

"오랜만이구나, 꼬마야."

 

 차갑고 냉정하면서도 사람을 홀리는, 아주 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서 울리는 그 목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키자, 온 몸이 검은 형체로 덮힌 여자가 나타났다.

 

"잘 있었냐는 시답잖은 말은 그만두지. 네게 선택할 기회를 줄거야. 한가지는, 이대로 영원히 사라지는 것,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네 정체성을 빼앗긴 채 사라지는 것."

 

"...그게 무슨 말이죠..?"

 

"네게 너무 어려운 말이니? 그럼 다시 일러주지. 그냥 죽는 것과, 다른 이가 네 모습, 기억,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두는 것. 물어보지 않고 진행할 수도 있겠지만... 넌 '그녀'가 신경쓰는 아이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은 전부 어렵고 이상했다. 하지만, 왜 이런 말을 하는 지는 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전, 죽게 되나요?"

 

"네가 시한부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잖니?"

 

 그녀의 말은 심장 깊이 폐부를 찔렀다. 알고 있던 사실이 이렇게 확연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시간이 없다면서도 그녀는 나른하게 웃으며 나를 지켜보았다. 먹이를 가지고 노는 암표범과도 같은 눈빛은 흥미로 빛을 발했다. 그는 분명 내가 어떤 답을 내릴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른이를 시키지 않고 직접 나타난 이유는 포식자의 위치에서 피식자의 구걸을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원하시는 대로 할께요. 다만...한가지 소원만 들어주시겠어요...?"

 

 

 

 

 

"명심해. 그 애는 깨어난 지 얼마 안됬고, 넌 이제 안타리우스의 C4-proto 타입이라는 것을. 더이상 '이글 홀든'은 없다는 것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껏 비웃음을 머금은 채 말하는 그는 함께 지낸 지 4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재수없었다. 그래도 그걸 내색할 마음은 없었다. 네가 살아서 깨어나게 해준 가장 큰 공로자이니. 그리고 그의 말에는 틀린 것 또한 없었다. 4년 전, 이글 홀든은 사라졌다. 서류 맨 마지막 장에 있던 약도는 장소의 위치를 외운뒤 불에 태워버렸다. 그리고 디미스트의 외딴 오두막으로 찾아갔을 때, 그 곳에는 이전에 본 내 클론의 사체와 안타리우스의 연구원들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머리를 자르고 까만 정장을 입었고, 클론의 사체는 내 옷이 입혀진 뒤 난도질 당해졌다. 내 얼굴을 버려둔채, 그들과 함께 이동했다.

그 후로는 매일이 같은 생활이었다. 명령을 받고, 검을 쓰고, 피를 뽑고, 감정을 죽이며, 옛동료들과 가족들에 맞서는 삶. 하루에 한번, 지친 몸을 이끌고 네 병실에서 네가 일어났을 때 너무 괴리감을 느끼지 않게, 머리카락과 손을 다듬어주는 것이 유일한 낙인 그런 생활. 지독하게 깨어나지 않는 너는 이글 홀든을 몇번이고 죽여서, 나와 똑같은 수많은 얼굴들도, FAKE라는 새로운 코드명도, 피를 흘리는 옛 동료들도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네가 깨어났다는 소식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왔던 일인데, 그렇게 간절했던 일인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순히 너를 보지 못해서 그렇겠지, 임무만 아니라면 하루이상 네 곁을 떠나 본 적이 없는데, 일주일 전만해도 창백하게 누워있던 네가 내가 임무를 나간 사이에 깨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서 이런거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데샹을 따라 네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문 앞까지 안내한 까미유 데샹은 그럼, 이만. 이라는 한마디 말을 건네고 떠났다. 그래봤자 상황실에서 모든걸 지켜보고 있겠지만. 이 문 너머에 네가 있다. 문고리를 잡았다가, 놓았다가, 손에 나는 땀을 옷에 닦았다. 이제야 조금 어떠한 생각이 들려했다. 지금의 나는 안타리우스의 복제를 흉내내는 원본이라는 것을. 이런 나를 보고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덜컹, 무언가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시커먼 무언가가 명치를 통과해 가라앉았다. 겨우 문고리를 잡아 쓰러지려는 중심을 유지하고 있을 때, 문고리가 달깍하고 소리를 내며 내려갔다.

 

아... 그렇구나, 난 네 이 모습을 보기 위해서, 그렇게나 미친듯이 헤멨구나. 한발짝, 다시 한발짝 걸어가 너를 품에 안았다.  아스라한 분홍빛이 내 심장으로 옮겨왔다. 가슴께까지 오는 작은 감촉이 너무도 소중해서, 그래서 너의 흔적이라도 그렇게 붙잡고 있었다.

 

@Cypher_Chi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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